<60>이등령의 한(恨)

‘이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우산도 없는데…….’

박달은 서둘러 나루터 근처에 있는 허술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에 비하면 규모는 보잘것없지만 진눈깨비를 피해 많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바람을 쐬겠다고 빈손으로 나왔지만, 주머니를 뒤져 보니 다행히 엽전 몇 푼이 있었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만 주시오.”

“알았수, 잠시 기다리슈. 주문이 밀려서 그러우.”

후덕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박달을 흘낏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박달은 금봉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탁주 한잔으로 달래보려 했다. 공부하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던 술이었다. 박달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 생각에 그만 울컥하고 서러움 치밀어 올랐다. 멍하니 겨울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자신이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겨울비 내리는 마포나루에서

한 잔술에 타향의 설움 잊으려 하는데

나그네 눈가에 이슬만 맺히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풍산의 백발 노모(老母)가 생각나고

고개 숙여 눈 덮인 한강을 보면

눈물의 이별가 부르던

시랑산 평동의 물항라 저고리 처녀가 그립네

저 창공을 나는 기러기처럼 날개 없으니

내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산 넘고 강을 건너 한걸음에 달려가리라

박달은 자신의 신세를 탓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며 흥얼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는지 주모와 다른 손님들은 낯선 사내를 자주 훔쳐보며 자기네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소곤거렸다.

험준한 이등령을 향해 걷다 금봉이는 두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발바닥에 금방 물집이 생기고 다리에 상처가 났다. 이등령 정상에 거의 다다른 금봉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향해 걸었다. 눈보라가 치면서 이등령은 뽀얗게 눈보라 속에 파묻혔다.

“서방님. 이등령 정상에 섰습니다. 바람은 차지만 서방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 일망무제

(一望霧堤)를 넘어 한걸음에 한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서방님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어요. 저 눈이 다 녹으면 오실 것인지요? 그때는 제가 서방님이 너무 보고 싶어 병이 났을 거예요. 오늘은 늦으셨으니 내일이라도 벌말로 오세요.”

금봉이는 고개에서 합장한 채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산하를 내려다보았다. 금봉이 정상에서 서서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돌이도 고개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는 길가에 숨지 않고 금봉이 곁으로 다가갔다. 갑돌이를 발견한 금봉이 깜짝 놀랐다.

“갑돌아, 네가 여길 어떻게?”

“네가 걱정돼서 왔어.”

갑돌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혹시 우리 엄마가 보냈니?”

“응. 너희 어머니가 나에게 오셔서 네가 말없이 집을 나갔다고 하시면서 걱정하시기에 내가 이등령에 다녀오겠다고 했어.”

“무엇하러 왔어? 금방 내려갈 건데.”

“네가 먼젓번처럼 넘어지면 안 되잖아.”

“넘어지긴 애들도 아닌데…….”

“금봉아, 너 그 박달도령 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니? 이제, 그 사람 그만 잊으면 안 돼?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시한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뭐라고? 박달님을 잊으라고? 말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갑돌이 너 그런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갑자기 금봉이는 정색하면서 갑돌이를 쏘아보았다. 쏘아보는 시선이 너무 따가워 갑돌이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금봉아 그게 아니고. 생각해봐 그 박도령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벌써 너를 찾아왔을 거 아니니? 그런데 아직도 꿩 구워 먹은 소식인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 자꾸만 그분 헐뜯는 소리 하려면 먼저 내려가. 난 더 있다가 갈 테니. 저 북녘 하늘이라도 바라보고 있어야 답답한 내 심정이 좀 뚫리는 것 같아. 집 안에 있으면 머리만 아프고 괜히 우울해져.”

‘계집애, 그 남자에게 얼마나 마음을 주었기에…….’

“아,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갑돌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그 이상으로 금봉이 박달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낙담하였다.

‘혹시나 했는데……. 금봉이가 그 사내 어디가 좋아서 단 며칠 사이에 폭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나?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갑돌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금봉이는 갑돌이가 안 되었다 싶었는지 미안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갑돌아, 나를 걱정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너에게는 정말로 미안해. 네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나도 네가 싫지 않았고 지금도 너를 멀리하는 마음은 없어. 다만, 다만 그분에게 내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래. 인제 와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갑돌아, 나를 욕해도 좋아. 나를 나쁜 년이라고 욕해도 달게 받을게. 나를 나쁜 년이라고 큰소리로 욕해. 난 너에게 욕을 먹어도 싸. 너의 순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전 처음 본 타지의 사내에게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너에게 욕을 먹어도 싸.”

금봉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책하고 있었다.

“아냐. 난 너를 욕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용기 없었던 나 자신이 미울 뿐이야. 그 무수한 시간 동안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라고.”

갑돌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갑돌아, 그러지 마. 자신을 학대하거나 비관하지 마. 세상에 여자가 나밖에 없니? 대처에 가면 발에 차이는 게 여자래. 나 같은 산골 소녀가 무에 좋다고 그러니?”

갑돌이 금봉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얼굴이 밝지 않았다.

“금봉아, 하나만 물어볼게.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물어봐. 무엇이든지.”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만약에?”

금봉이 갑돌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해하였다.

“응, 만약에 그 도령이 이 벌말에 안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니? 아니 영원히 안 오면 말이야. 한양에서 다른 여인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리거나 어떤 사정이 있어 이곳 평동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 놓은 거야?”

갑돌이 진지한 태도로 금봉이에게 물었다.

“말도 안 돼. 박달님은 나하고 약속했어. 절대로 나를 배신할 분이 아니야. 박달님이 안 오신다면 분명 그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신 걸 거야. 무슨 사정이 생겨서 못 오고 있는걸 거야.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결되면 나를 보러 오실 거야. 난 요즘 매일 밤 박달님 만나는 꿈을 꾸고 있어. 어젯밤에도 그분을 만나는 꿈을 꾸었어. 그분이 어사화를 꽂은 모자를 쓰고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꿈을 꾸었어. 아마도 조만간 저 들판을 가로질러 벌말로 달려 오실 거야. 오늘은 늦은 거 같으니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꼭 오실 거야.”

금봉이는 자신의 바람이 곧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그것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봉이 그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분명 그 남자가 하루빨리 찾아오지 않으면 금봉이가 병이 날 텐데…….’

“금봉아, 그 남자가 한양에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살림을 차렸거나, 과거에 낙방하여 끝까지 안 온다면 너만 골병이 나고 말 거야. 이제는 체념하는 게 너와 뱃속 아이에게도 그리고 너희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이로운 일일 거야. 이제 잊으면 안 되겠니?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고역이야.”

“난, 난 이미 그분에게 모든 것을 드렸어. 그리고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난 지금 홀몸이 아니야. 그분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는데, 이제 와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금봉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흐느꼈다.

“그, 금봉아, 울지 마라. 아기에게도 안 좋아. 날씨도 쌀쌀한데 울면 안 돼.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다. 미안해."

갑돌이는 흐느끼는 금봉이 등을 다독거리며 달랬으나 한번 울음을 터트린 금봉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금봉아. 이제 그만 울어. 건강에 안 좋아 그만 울어. 응. 내가 잘못했어.”

한번 터진 금봉이의 울음보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갑돌이도 그만 금봉이가 서럽게 울자 마음이 짠해 오면서 울먹거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흐느끼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갑돌아, 정말로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내가 나쁜 년이야. 너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한 내가 나쁜 계집애라고. 나를 영원히 나쁜 년이라고 욕해도 달게 받을게. 너의 마음을 잘 알면서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정말로 나쁜 년이라고. 지금의 이 결과는 온전히 나의 욕심에서 비롯한 거야.”

“금봉아,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도 요즘 너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서 미치겠어. 두 눈 벌겋게 뜨고 너를 도둑맞은 느낌이야. 너를 보호해 주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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