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잘난 남자, 잘난 여자

“갑돌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금봉아, 이건 좀 전에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약의 일인데. 너 그 아기 낳을 거니? 아기 아버지가 끝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그 아기를 낳을 거야? 그래, 좋아. 만약에 그 남자가 너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그 아기의 아버지가 되면 안 되겠니? 아비 없이 어떻게 아이를 키울 거야?”

“갑돌아,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아기의 아버지는 박달님이셔.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 아기의 아버지가 된다는 거야?”

“네가 아기를 낳고도 그 박달도령이 안 오면 내가 키우겠다고.”

“그럼, 남의 아기를 낳은 나를 네가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이니?”

“까짓것 남의 아이를 양자로도 들이는데 뭐?”

“그건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야? 마을에서도 양자를 들여 친자식처럼 키우는 집이 있잖아.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건넛마을 김 초시댁도 양자와 양녀를 들여 양육하고 있잖아. 비록 그 아이가 내 핏줄이 아니라고 하여도 내 핏줄로 생각하고 키우면 되잖아.”

“안 돼. 그분은 꼭 오셔.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말도 안 돼. 설령 그런 경우가 온다고 하여도 내 양심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이 동네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닌단 말이니?”

금봉이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박도령이 끝까지 안 오고 네가 그 아기 낳으면 나랑 멀리 떠나가서 살면 되잖아. 난, 난 그럴 의향이 있어. 너만 좋다면.”

“갑돌아, 부탁인데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나,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그분은 꼭 돌아오셔.”

쿨럭-.

금봉이는 한동안 멍하니 북녘 하늘을 올려보다가 기침하기 시작했다.

“금봉아, 이제 그만 가자. 너 홀몸도 아닌데. 너무 오래 한 데에 있었어. 빨리 돌아가자.”

갑돌이 길을 재촉하였지만 금봉이는 딴전을 부렸다.

“갑돌아, 저기 저 하늘 좀 봐.”

금봉이 북녘 하늘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떼를 가리켰다.

끼룩-.

“예전에는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북녘에서 날아오는 새조차 반갑고 눈물이나. 분명 저 기러기 떼들이 박달님 안부를 가지고 왔을 거야.”

한 떼의 기러기들이 끼룩끼룩 길게 여운을 남기며 금봉이 서 있는 이등령 위를 두서너 바퀴 돌더니 이내 남녘으로 사라졌다.

“갑돌아, 너도 들었지? 저 기러기들이 분명히 나에게 박달님의 소식을 전했어. 박달님께서 나에게 보낸 안부 편지야. 내가 몹시도 보고 싶다고 하셨어. 아!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금봉이는 합장한 채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반쯤 허리를 굽히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일을 어째? 이제 금봉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금봉아, 저건 단지 새일 뿐이야. 새들이 어떻게 인간의 소식을 전해?”

“바보, 난, 저 기러기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어. 분명히 박달님의 소식을 전해주었어. 곧 나를 찾아온다고 하셨어.”

금봉이는 기러기 떼의 끼룩거리는 소리를 뇌리에 담고 그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갑돌이와 금봉이가 이등령에서 내려오자 눈이 내렸다.

“서방님, 들으셨어요?”

“뭘 말이오.”

“조정에서 별시를 본다고 하는 소식 들으셨어요?”

“아니요. 못 들었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오?”

“아침에 찬거리를 사러 이 현(梨峴) 시장에 갔다가 방이 붙은 것을 보았어요. 내달 초사흗날 경회루에서 본다고 했어요. 이번에는 먼젓번 증광시보다 입격자를 뽑는 수가 많지는 않지만, 열심히 하시면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아지의 눈에는 감격해 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마치 아이들처럼 기뻐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들떠 있었다.

“고, 고맙소.”

박달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입격(入格)하고야 말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문약한 상감이 대비의 보이지 않은 수렴청정(垂簾聽政)에서 벗어나 국정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다행히 많은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났다.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상감과 종친들의 애를 태웠던 대비의 건강이 좋아진 점과 상감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십 년이 되는 해이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점 또한 비빈(妃嬪) 중 한 명이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 상감의 심기를 편안하게 하자 상감은 특별사면령을 내려 전국 팔도의 감옥에 갇혀있는 경범자(輕犯者)들을 방면하면서 예조(禮曹)에 명해 별시를 준비하도록 했다.

아지는 예전보다 박달에게 신경을 더 썼다. 잠자리는 종종 같이하기는 하였지만, 책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만 했다. 아지는 박달에게 분 냄새를 맡게 할 경우 저번처럼 또 낙방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아지도 여자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온종일 거친 남정네들을 상대하면서 국밥과 웃음을 팔아야 하는 억척스러운 여장부이면서 뜨거운 여자였다. 마음 같아서 밤마다 헌헌장부인 박달 도령을 끌어안고 육욕(肉慾)의 향연을 갖고 싶었지만, 과거에 낙방으로 인하여 심적 충격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박달에게 다시 청운의 꿈을 펼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지는 밤마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음심(淫心)을 달래기 위하여 영업이 끝난 뒤 홀로 자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참으로 박복한 년이로다.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게 틀림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별시에 박달 서방님이 보란 듯 입격해야 해. 그래서 지나간 나의 한을 풀어야 해. 그러나 또 악몽이 재연된다면 어쩌지?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분명히 서방님께서 입격할 거야. 만약에 또 낙방한다면 어쩌나? 아아, 머리아파.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쩌나? 나도 모르겠어. 그 일은 그 때가서 생각해보기로 하지 뭐. 그때 가서…….’

아지는 술에 취해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히죽거리기도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언니, 이제 그만 마시고 주무세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거드는 언년이는 아지가 걱정되었다. 아지는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거의 밤마다 술을 마셔야 잠을 잘 정도였다.

“너도 한잔할래?”

“언니, 난 술 못 마시잖아.”

“여자나 남자나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이렇게 맛있고 달콤한 감주(甘酒)를 마시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야. 그저 세상일이 복잡해 머리가 지끈거릴 때는 술이 최고의 약이라고. 그럼 너는 머리 아플 때 뭘 먹니?”

“언니, 난 언니처럼 욕심 없어. 그냥 하루 세끼 밥 먹고 잠잘 공간 있고 일할 수 있는 근력 있으면 돼. 더는 욕심 부려 봤자 심신(心身)만 피폐해질 뿐이야. 나는 어릴 때 그런 일을 많이 겪어서 이제 남자에게 흥미조차도 없어.”

“넌, 남자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잖니? 그러나 난, 난 말이야, 한번 꾼 꿈을 접을 수 없어. 꼭 이루어야 해. 그 꿈이 깨지면 다시 쌓고 또 깨지면 또다시 쌓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날이 있겠지. 난 절대 나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아지는 홀짝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아지 언니처럼 독하게 살아야 하는데 난 그럴 자신이 없어. 그러나 한편으로 속이 편해. 남자는 그저 어쩌다 그게 생각날 때 불러들이면 되고. 남자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품이야. 그런데 그 소품을 잘못 다루면 주객(主客)이 전도되고 말지. 그래서 소품은 잘 다뤄야 해. 자주 갈아 끼우거나 새것으로 교체하면 더욱 좋고.”

“너는 나보다 나이는 서너 살 아래지만 남자에 대하여는 선배로구나.”

“그런가?”

“언년아, 네가 보기에 박달 도령님은 어떠니? 솔직하게 말해봐.”

“언니,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절대로 화내면 안 돼? 알았지?”

“그래. 알았어. 어서 말해봐.”

“언니, 저 박달님에게 미련 버려. 저분 만약에 이번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다른 여자에게 갈 거야. 지금은 언니가 뒷바라지해주니까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는 것이지. 과거에 떡하니 붙으면 그 날로 다른 데로 훨훨 날아갈 분이야.”

“언년아, 네가 그걸 어떻게 장담하니?”

“박달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때까지 여자들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할 상이야. 남자나 여자나 그저 적당하게 생겨야지. 너무 잘생기면 주변에서 그냥 놔두지 않으니 그게 문제라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도 있잖수. 언니나 박달 도령님이나 세상의 벌 나비들이 가만두지 않으니 그게 문제지.”

‘이것이 남자를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주둥일 놀려? 정말 눈꼴셔서 못 들어

주겠네. 마치 제 년이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지껄이네.’

“얘, 시끄러워. 술맛 떨어지겠다. 네가 그분을 잘못 봤어. 박도령님은 야박한 성격이 못돼. 두고 봐라. 그분이 과거에 합격하면 나랑 혼인하자고 덤벼들 테니.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시집가면 되는 거야. 대낮에 눈을 뜨고 다녀도 코 베가는 이 한양 바닥에 책상물림은 절대로 혼자 못 살아. 나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 박도령 같은 서생(書生) 곁에 있어야해. 어찌 보면 나는 그런 분들을 위하여 태어났는지도 모르지.”

아지가 심기가 뒤틀려 언년이에게 눈을 흘기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조심해요. 남자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돼요. 특히 박달님처럼 훤칠하니 잘생긴 남자는 마음을 한 곳에 정하지 못해. 양귀비(楊貴妃)가 오라고 하면 얼른 달려갈 것이고, 왕소군(王昭君)이 눈만 찡긋하면 또 그곳으로 쪼르르 달려갈 거며, 초선(貂蟬)이 눈물을 흘리면 얼른 옷을 찢어서 눈물을 닦아 줄 남자라고요. 남자나 여자나 마음이 너무 여려도 못쓰지요. 줏대가 없는 남자는 평생 문제를 만든다고요. 내가 보기에는 박달 도령님도 평생 여인네 치마폭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 그 윤가 놈에게 된 통 한번 당하더니 인생을 다산 사람 같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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