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마을의 관심사가 되다

“언니가 걱정돼서 드린 말씀입니다.”

“고맙구나. 오늘은 술맛이 텁텁한 것이 마치 쌀뜨물을 마시는 것 같구나.”

“언니, 박달님이 입격하시면 언니하고 혼인한다고 두 분이 약속했어요?”

“아니, 그런 약속 한 적은 없지만, 양심 있는 분이면 나를 그냥 버려두겠니? 내가 그동안 그분에게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어휴, 언니도 참. 언니는 보기에는 약아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무른 데가 많아요. 특히 잘생긴 남자에게는 더 그런 것 같아. 물론 언니만 그렇겠수? 대개의 여인들이 박달님처럼 헌헌장부만 보면 오금을 못 펴니 원.”

“얘, 그만하고 자자. 너하고 이야기하다간 밤새우겠다.”

이등령에 다녀온 뒤로 금봉이는 심한 몸살을 앓더니 이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탕약을 먹었지만 계속 나오는 기침에 최대호와 봉양댁은 어쩔 줄 몰라했다. 자신의 몸속에 박달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환희이지만 밤이면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서방님, 어찌된 것인지요? 저는 서방님 기다리다 말라 죽겠어요? 왜 안 오시는 것인지요?”

밤마다 딸아이의 흐느끼는 소리에 봉양댁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당장 사람을 사서 한양으로 올려 보내 박달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고 싶었다. 임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곁에서 바라보는 부모에게 묵묵부답으로 흐르는 세월은 잔인하기만 했다.

“오늘은 서방님이 오실 거야. 간밤에 서방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셨어. 오늘은 꼭 나타나실 거야.”

금봉이는 이제 기다리다 지쳐서 자주 박달 도령의 환영(幻影)까지 보았다. 자꾸만 불러오는 배를 부여안고 금봉이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소리 없이 흘러도 박달은 벌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서방님께서 꼭 오실 줄 알았는데. 내일은 꼭 오시겠지.”

금봉이는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뱃속에서 태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제 제법 배가 불러 복대를 하지 않으면 금방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런 딸을 곁에서 바라만 봐야 하는 봉양댁의 한숨 소리와 시름은 날로 더 깊어만 갔다. 최대호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얘야, 그 사내를 잊고 낙태를 시켜야겠다. 네가 그 사내에게 속은 게 분명해.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남정네를 어찌 기다린단 말이냐? 배 속에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지우자. 이제는 복대를 해도 티가 나니 어쩔 수 없구나. 제발 엄마 말대로 해.”

“안돼요. 어머니. 절대로 아이를 지을 수 없어요. 절대로…….”

“이 미련한 것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 뭐 하려고 하니? 바보같이 덜컥 정을 줘서 이 고생이야. 더 늦기 전에 어서 아이를 지워야 해.”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분은 반드시 나타나실 거예요."

"에구, 에구! 미련한 것 같으니……."

밤마다 모녀는 아이의 낙태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금봉이의 고집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월만 흘렀다. 또 뒤늦은 폭설이 내려 이등령을 넘나드는 사람의 발길도 뚝 끊겼다. 금봉이는 이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금봉이 임신 사실은 인근 마을에까지 사람들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으이샤, 모 나와라.”

“도다. 도.”

“모다. 수돌이 최고다. 지화자, 지화자. 조오타.”

정월 대보름날, 벌말 사람들은 윗말과 아랫말로 나뉘어 아랫마을 김좌수 댁 앞마당에 모여 윷놀이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윗마을 수돌이가 던진 윷이 모가 나오자 윗마을 사람들은 소리를 질러대며 어깨춤을 추었다. 마을의 아녀자들이나 총각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모두 나와 마을 잔치에 참여했다. 김좌수 댁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관통하는 마을 도로 중간쯤 자리하고 있어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나 마을 잔치가 있을 때 모이는 장소였다.

넓은 앞마당에 윗마을과 아랫마을 장정들은 전날부터 대여섯 동의 천막을 쳐놓고 옆에 큰 가마솥을 앉혀 마을 잔치에 빈틈이 없도록 하였다. 이날은 마을에서 웬만큼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막걸리나 돼지고기 또는 쇠고기를 내어 품위를 유지하였고, 마을 총각, 처녀들은 자유롭게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평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넌지시 전하곤 하였다. 간혹 마음이 맞는 남녀는 마을 사람들 시선을 피해 방학리 궁뜰이나 물레방앗간 또는 윗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밀어를 속삭였다.

딸의 일로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금봉이 아버지 최대호도 윗마을 대표로 나서서 윷놀이에 참여하고 있었다. 봉양댁도 마을 아낙네들 틈에서 윷놀이를 구경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개똥네, 저기 금봉이 어머니가 나왔구먼. 얼굴이 편치 않은 모습이야.”

“왜 안 그렇겠수? 금이야 옥이야 하던 딸이 애를 뱄다는데…….”

“그런데도 저렇게 뻔뻔스럽게 내외가 나와서 윷놀이를 하는 거 보면 얼굴이 두꺼운 사람들인가 봐?”

“쇠똥어멈, 우린 저기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구. 오늘은 구두쇠 윤영감도 막걸리와 쇠고기를 냈다고 하잖수?”

마을 아낙들은 모이면 금봉이를 화제의 주인공으로 올려놓고 나름대로 추측을 해가며 소문을 확대해 갔다.

"금봉이가 아이를 가졌다며?"

동네 총각들과 나이 좀 든 축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면서 역시 금봉이 이야기를 안주 삼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말세여 말세.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를 배다니 별일이여."

"혹시 수돌이 놈이 금봉이에게 씨를 뿌린 거 아녀?"

“수돌이는 착해서 그런 짓 못 해. 어쩌면 약삭빠른 갑돌이 녀석이 씨를 뿌렸을지도 몰라. 개똥이 같은 녀석은 멍청해서 씨를 뿌릴 줄도 모를 테고…….”

"갑돌이도 마음이 여려."

윷놀이하면서 중간 중간 탁주로 칼칼한 목을 축이던 동네 나이 지긋한 축들도 금봉이의 임신 사실을 안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금봉이가 지난해 늦가을부터 이등령을 자주 오르내리곤 했대. 왜 이등령을 오르내렸을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럼, 거기서 재 너머 사는 그 총각을 만나러 다닌 거 아녀? 이 근동에서는 제일 잘 생겼다는 최초시네 셋째 아들 말이여. 글 잘 쓰고, 시 잘 짓고,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춘다는 그 최초시네 셋째 아들. 처녀들이 그 도령을 보면 자지러진다면서?”

“그런 것도 아닌가 봐. 사람들이 봤는데 금봉이가 온종일 바위에 앉아 북녘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다 내려온다는 거야.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여. 산골 처녀가 왜 북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내려올까?”

"그럼, 동네 청년들 짓이 아니게 분명해."

"참, 지난가을에 웬 과객이 잠시 금봉이네 집에 묵은 적이 있었지? 혹시 그 작자가 금봉이에게 씨를 내린 거 아닐까?"

"맞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때 그 사내가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다면 지금쯤 배가 불렀을 거야. 지금 금봉이가 배가 부른 거하고 그때의 그 사내가 다녀간 시기하고 거의 맞아떨어지잖아. 틀림없이 그 사내가 씨를 뿌렸을 거야. 그 과객을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사내가 어찌나 잘 생겼는지 여인들이 한번 보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래. 최초시네 셋째보다 더 잘 생겼다고 하던데?”

“그 과객이 그렇게 잘 생겼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니 도도하던 금봉이와 금봉이 아버지도 첫눈에 반했을 거야. 분명히 그자가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을 거야.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지금쯤 금봉이가 배불러 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참, 그러고 보니 이제 생각났다.”

“뭐가?”

“그때 동네 총각들이 금봉이와 웬 남자가 늦은 밤 물레방앗간에 드나드는 걸 보았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래? 그럼 그 과객이 금봉이를 건드린 게 분명하구먼. 청춘남녀가 야심한 시각에 물레방앗간에 들어가서 뭘 하겠어? 뻔할 뻔 자 아닌가?”

“이 마을 총각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두 눈 뜨고 어여쁜 마을 처녀를 도둑맞다니. 멍청이들이구먼.”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 사내 인물이 그렇게 출중했나?"

“인물뿐만 아니래. 글도 잘하고, 언변도 좋고, 예의도 바르다고 하던데? 하여간 한번 보면 웬만한 여인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래.”

"그런데. 그 사내는 왜 안 나타나나?"

"이 사람아. 지금 눈이 저렇게 쌓여 재를 넘어 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찾아오나?"

"그렇다면 봄이나 돼야 오겠지."

“저러다. 금봉이 어떻게 되는 거 아냐? 금봉이 아버지와 어머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겠구먼. 쯧쯧…….”

마을 돌아가는 소식에 둔한 노인들까지 금봉이의 임신 사실을 놓고 설왕설래하였다. 동네잔치뿐만 아니라 이제는 두 사람만 모여도 금봉이 이야기가 주된 화제가 되었다. 윷놀이는 윗마을이 이겨서 윗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술에 취하여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한바탕 잔치를 치른 벌말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여보게, 금봉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대?”

“모르지. 궁금하면 금봉이 아버지에게 물어와.”

“이 사람아, 딸 문제로 골머리 아파할 텐데 어찌 물어보누?”

잠잠하다가도 특별히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마을 사람들은 금봉이 이야기를 꺼냈다. 금봉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심심풀이나 다름없었다. 동네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은 금봉이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돌이를 비롯한 다른 청년들도 금봉이를 타인에게 빼앗긴 것이 원통해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고 다니며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최대호는 딸이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것을 알면서 집에 들어오면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갈수록 배가 불러오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딸이 걱정되어 보약을 사다 주기도 하고 딸 대신 눈이 녹은 이등령을 오르내리며 한양에서 내려오는 과객들을 붙잡고 박달의 소식을 물었으나

모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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