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주모의 비정함

"고얀 사람 같으니.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딸을 맡기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지. 저러다 생떼 같은 딸자식만 죽게 생겼구나."

딸의 임신과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최대호는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금봉이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박달이 꼭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꽃피는 봄이 오면 반드시 박달이 올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기다려보기로 하였지만, 심신이 점점 피폐해져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이것아, 뭘 좀 먹어야지 힘을 낼 거 아냐? 자. 이 미음이라도 들어봐. 소식도 없는 작자를 기다려 무얼 한단 말이니? 이제 단념해. 이제는 네 살길을 찾아야지 끝내 오지도 않은 사람을 기다릴 필요 없어.”

“어머니, 죄송해요. 박달님은 꼭 오세요.”

"어이구! 내가 빨리 죽든지 해야 이 꼴을 안 보지. 천지신명님도 야속하시지. 그리도 빌고 빌었거늘……."

하루가 다르게 금봉이의 건강이 악화하자 다급해진 최대호는 의원을 불러다 진맥을 보게 하였다. 금봉이를 진찰한 의원은 최대호를 집 밖으로 불러 결과를 말해 주었다.

”어쩌다 따님이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시었소? 큰 병이 들어 나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 없소.”

“의원님, 그럼 우리 딸아이는 어찌 되는 겁니까?”

“홀몸이 아닌 관계로 보통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자야 하거늘……. 따님은 지금 몸에 진기가 모두 빠져 겨우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내버려 놔두다가는 큰일 날 것 같습니다. 빨리 무슨 조처를 하지 않으면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아요.”

“의원님, 어찌해야 하는지요? 어찌해야 딸을 살릴 수 있겠는지요?”

“상사병에 명약은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면 깨끗이 낫습니다. 따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금봉이 아버지께서 따님의 입장을 용서하시고 빨리 그 사내를 만나게 해주세요. 내 판단에는 따님의 중병을 낫게 하는 약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아-.

최대호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드는 처방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생명이 꺼져가는 딸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빨리 손을 쓰셔야 합니다. 따님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있습니다.”

“의원님, 만약에, 만약에 이대로 차도가 없으면 우리 딸애의 목숨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의원은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송구하지만, 한 달도 못 갈 것 같습니다.”

“네에? 하, 한 달이요?”

의원 말에 충격을 받은 최대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 한 달이라? 한 달…….”

의원의 말에 다급해진 최대호는 박달을 찾으러 한양으로 떠날 결심을 하였다. 사람을 사서 보내느니 한양에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직접 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였다.

‘내 딸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만 넓은 한양 바닥 어디 가서 박도령을 찾을꼬? 저애를 저리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내가 찾으러 갈 수 밖에…….”

최대호는 과수댁을 찾아 홀로 술잔을 드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또래의 동네 친구들도 있었지만 딸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려면 혼자 자작하는 좋을 것 같았다. 탁주 한 주전자를 비우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자 봉양댁이 최대호의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당신 혼자 가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데리고 가세요. 당신 혼자보다 두 서너 명이 올라가서 찾아보는 게 훨씬 수월할 거 아니에요. 한양이 얼마나 넓은데 혼자 가서 그자를 어떻게 찾으려고요?”

봉양댁은 남편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이든 시골 사람이 혼자 다니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전에도 몇 번 한양을 다녀온 적이 있으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지방에서 올라 온 유생들이 묶는 주막 촌이나 객사가 몰려 있는 지역을 샅샅이 뒤져보면 박도령을 만날 수 있을게요.”

그는 총각 때 한양의 유명 기루와 유곽을 다녀온 기억을 떠올렸다.

“내 말대로 해요. 갑돌이를 데리고 가요. 요즘 농한기이니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거 같은데. 그 애는 똑똑하고 몸도 재니 데리고 가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양심이 있지, 그 얘를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겠소.”

그는 갑돌이와 동행하고 싶어도 차마 양심상 그리할 수 없었다.

“지금 저애 목숨이 더 중요하지, 그 알량한 양심이 뭐가 그리 중요해요. 갑돌이를 데리고 가면 당신보다 그 애가 박도령을 먼저 찾아 낼 겁니다.”

“알았어요. 내 갑돌이에게 부탁해보지.”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내가 갑돌 엄마한테 부탁해 볼게요.”

그녀는 갑돌이 어머니와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 모두 혼기가 꽉 찬 자식을 가지고 있고, 갑돌이 집에서 금봉이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터여서 서로 속내를 터놓고 지내고 있었다.

“형님, 먼저 갑돌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겠어요. 그 양반도 웬만하면 허락할 겁니다. 지금 마실 나가셨으니 집에 돌아오면 물어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아우님, 부탁해. 내가 섭섭지 않게 수고비를 내놓을 게.”

“아유, 이웃지간에 무슨 수고비를…….”

갑돌이 어머니는 마을 최고 부잣집에서 수고비를 준다는 말에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갑돌네는 금봉 아버지로부터 논과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었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늘 보이지 않는 구속을 받는 형편이었다.

“금봉 아버지 한양 가는 길에 갑돌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지금 금봉이 목숨이 그 박달인가 뭔가 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대요. 의원이 그러는데 금봉이가 그 작자를 만나면 병이 씻은 듯 낫는다고 했대요.”

그녀는 아들이 금봉과 사이가 좋아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줄 알았다가 금봉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갑돌이를 데리고 가는 삯으로 우리에게 얼마를 준답디까?”

“부잣집에서 알아서 할 테지요. 그걸 어떻게 물어봐요?”

“아따, 뭐 어때서? 남의 자식을 부려먹으려면 얼마를 주겠다고 먼저 말을 해야 할 거 아녀?”

갑돌 아버지는 머릿속으로 셈을 하고 있었다.

‘음-, 금봉 아버지가 적어도 백 냥은 내놓겠지. 부잣집에서 백 냥이 그리 큰 부담이 안 될 테니. 그렇지 않아도 요즘 노름판에서 돈을 몽땅 잃어 궁색했는데, 잘 되었군,’

갑돌의 아버지는 목돈이 들어온다는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궐련을 연신 빨아 댔다.

“금봉 엄마한테 갑돌이를 데리고 가라고 알리구려. 그리고 슬쩍 물어봐요. 갑돌이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요.”

“적어도 백 냥 정도는 내놓겠지요.”

“그 정도는 좀 적은데, 한 이백 냥 정도는 돼야지. 수천 냥을 늘 집에 두고 사는 집에서 겨우 백 냥이 뭐여.”

“당신은 자나 깨나 돈타령이오? 이번에는 그 집에서 갑돌이 수고비를 주면 내가 받아서 집안 살림에 보탤 거니까 당신은 그 돈에 손댈 생각마세요.”

“뭐여? 나는 애비여. 이 집 가장이라고.”

“당신이 언제 제대로 가장 노릇한 적 있어요? 갑돌이가 집안 살림 맡아서 꾸려가고 있잖아요.”

부부는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그래? 금봉이 아버지가 갑돌이를 데리고 한양에 올라간다고?

그 어르신 참말로 이해할 수 없네. 한때는 갑돌이를 사윗감으로 생각하다가 그 박달이라는 과객이 나타나자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꾸고 딸까지 저리 되었는데, 갑돌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나?”

수돌이네 사랑채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최대호의 염치없는 행동을 두고 성토하기 바빴다.

“이 마을에서 갑돌이 만큼 몸이 재고 똑똑한 총각이 없지. 수돌이나 개똥이, 쇠똥이는 갑돌이 반도 못 따라가. 지금 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양심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빨리 한양에 올라가서 그 박달인가 뭔가 하는 놈 멱살을 잡고 끌고 와야 해.”

김씨가 금봉의 아버지 입장에서 좋게 말하였다.

“김씨 말이 맞아. 일단 사람 목숨은 살려 놓고 봐야 해. 상사병에는 보고 싶은 임을 보면 씻은 듯 낫는다고 했다면서? 마을 총각 녀석들은 도대체 두 눈뜨고 도대체 뭘 했어. 금봉이 같이 예쁜 처녀를 타관 사람에게 빼앗기다니. 갑돌이, 수돌이, 개똥이, 상준이, 영부, 광천이, 재성이, 재석이……. 그 녀석들은 불알도 없나?”

“참으로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여. 이 일은 마을 차원에서 다뤄야해. 금봉이가 저리 된 것은 마을사람 모두의 책임이여.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면 경계를 해서 이 마을 처녀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 했다고. 당장 마을 전체 회의를 열어 금봉네를 도와야해. 이번 사태는 마을 전체에서 신경을 써야한다고.”

마을에서 입심이 세기로 이름난 곽씨와 조씨가 핏대를 세웠다.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큰 형님으로 존경을 받는 입장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은근히 두려워하였다.

“곽씨 말도 일리가 있어. 밤늦게 외지인이 오면 그동안 금봉네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했잖아. 물론 그 집이 부잣집이고 우리들은 살림이 팍팍하다는 이유로 외지인이 오면 무조건 금봉네로 보낸 것이 잘못이야. 우리 모두 금봉이가 저리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어.”

이번에는 배씨가 금봉에 대한 동정론을 제기하였다. 수돌이네 사랑채는 농한기(農閑期) 동안에는 마을 회관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 마을의 대소사에 대한 말이 공론화 되어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거나 옳다고 여기면 금방 마을 전체의 의견이 되어 이장에게 들어갔다. 이장(里長)은 마을 민원을 마을 원로들과 말발이 센 사람들의 동의 얻어 시행하곤 했다. 최대호와 갑돌이가 한양에 간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고 이장은 금봉의 아버지를 찾아 왔다.

“아저씨, 갑돌이와 한양에 그 과객을 찾으러 가신다면서요?”

“자식이 저리 누워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종철이도 데리고 가세요. 그 애도 갑돌이 못지않게 똑똑하니 그 박도령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갑돌이와 종철이 한양에 가는 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돕기로 했습니다.”

금봉의 아버지는 이장의 말에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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