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영악한 주모

“아닐세. 내가 그 두 사람의 수고비는 얼마든지 댈 수 있네. 이장이 그리 권하니 그럼 종철이도 데리고 가지. 비용은 신경 쓰지 마시게. 그 두 사람에게 한양 갔다 올 때 까지 드는 비용은 내가 부담하고 수고비로 두 사람에게 각각 이백 냥씩 내놓겠네.”

벌말뿐만 아니라 근동에서 가장 큰 부자인 최대호에게 돈 사백 냥은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아저씨, 무슨 이백 냥씩이나 내놓으세요?”

“추운 날씨에 한양에 다녀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럼, 두 애들에게 알려 한양 갈 채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최대호와 갑돌이, 종철이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평동 벌말을 떠났다. 세 사람은 마을 원로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등령을 향해 갔다. 세 사람은 이등령은 넘어 북녘을 향해 걸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앞장서서 걷던 갑돌이 금봉의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눈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시냇가에서 졸졸거리며 물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어르신, 좀 쉬었다 가세요. 힘드실 텐데…….”

“난, 괜찮다. 너희들이 괜히 고생하는 구나.”

“아닙니다.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어르신이 고생이지요.”

세 사람은 양지 바른 곳에 잠시 괴나리봇짐을 풀고 앉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란다. 함부로 맺은 인연이 훗날 엄청난 결과를 낳지. 좋은 인연은 두 사람과 양가(兩家)에 영광일 수 있겠지, 그렇지 못한 인연은 치욕일 수도 있고. 이번에 금봉이 문제는 아직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왠지 불안한 생각이 가시질 않는구나.”

그는 궐련을 피우면서 불안한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어르신, 희망을 가지세요. 한양에 도착하면 박도령이 기거하고 있는 주막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석 달이 지났는데도 안 온다는 것은 필시 그 도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직접 만나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만약 박도령이 안 내려가겠다고 버티면 제가 강제로라도 데리고 올 겁니다. 좀 더 일찍 떠났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갑돌의 말에 금봉의 아버지는 속으로 기꺼워하였다.

“나 혼자보다 너희들이 함께하니까 든든하구나.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박도령이 내 집에 머물지 않았더라면 갑돌이에게 좋은 일이 있었을 텐데…….”

“어르신…….”

갑돌은 ‘좋은 일’이란 말에 속이 쓰렸다. 자기의 여자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에 그는 잠시 우울해 했다. 세 사람은 이등령을 넘고 충주 산척(山尺)을 지나 안성의 양성(陽城)을 거쳐 음성의 감곡(甘谷)을 경유하여 장호원(長湖院)을 통과하여 닷새 만에 여주의 가남(加南)에 도착하였다. 한양으로 향하다가 주막이 없는 곳에서는 돈을 주고 민가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도 하였다.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세 사람은 산길, 들길, 물길을 오십 리가량 걸었다.

“갑돌아, 오늘은 가남에서 하루 묵고 가자. 매일 강행군하느라 다리도 아프고 피곤할 테니 저 주막에서 푹 쉬자구나.”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가남은 한양 가는 과객들이 거쳐 가야 하는 지점이라 과객들을 위한 시설들이 제법 있었다. 세 사람은 규모가 꽤 큰 주점에 들렀다. 주점 안은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여기, 세 사람 먹을 식사하고 술도 좀 내오시오.”

최대호는 갑돌과 종철의 고역(苦役)을 한잔 술로 달래주고 싶었다. 갑돌이와 달리 종철이는 힘이 좋아 마을을 대표해 씨름대회에 나가면 상으로 소를 타와 부모를 즐겁게 했다. 씨름뿐만 아니라 싸움에도 탁월하여 평동뿐만 아니라 근동에서는 종철이를 당할 자가 없었다.

“한잔씩 들어라. 너희들과 함께하니 내 마음이 든든하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평동에서 한양까지는 보통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금봉이 병세가 위중하다 들었습니다. 어르신, 이 속도로 가다가는 너무 시일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갑돌은 한양에 도착하여 박달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오고가는 사이에 금봉의 환우가 급속도로 나빠질 것을 우려하였다. 만약 박달을 찾아 함께 평동에 내려가더라도 금봉이 별고가 없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속도가 빠른 마차를 타고 갈까 한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니니?”

“어르신, 잘 생각하셨어요. 갑돌이 뿐만 아니라 저 역시 마음이 급합니다. 그 작자를 찾아서 빨리 금봉이에게 가야하잖아요.”

종철의 말에 금봉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행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다음날 계획과 한양에 도착해서 할 일들을 상의 하였다.

“한양 노량진까지 일인당 백 냥은 주셔야 합니다. 빠르면 모레 오후쯤 도착할 수 있습니다.”

“좋소. 빨리 갑시다.”

이럇-.

마부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세 사람은 가남에서 말 두필이 끄는 두 바퀴 달린 마차를 탔다. 마차는 사람이 걷는 속도의 서너 배는 빨랐다. 그들은 이천 마장(麻長)을 지나 곤지암(昆池岩)을 거쳐 판교(板橋)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양재(良才)를 거쳐 해가 넘어갈 때 쯤 노량진(露梁津)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노량진에서 배를 타고 마포나루로 건넜다. 최대호는 환쟁이를 찾아가 박달의 인상을 말하고 초상화 서너 장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일행은 근처 주막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막과 객사 그리고 객사 등 닥치는 대로 박달의 초상화를 내밀고 박달을 수소문 하였다.

서너 집을 뒤졌지만 박달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비슷한 용모의 과객을 본적도 없다고 하였다. 곧 날이 어두워져 박달 찾기를 멈추고 일행은 주막에 들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서둘러 주막을 나온 세 사람은 운종가와 피마골을 뒤졌다.

“주모, 혹시 이런 사람 본적 있소?”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혹시 보시거든 어디 거주하는 지 잘 알아봐요. 내 사흘 후에 다시 들리리다.”

주막에 들릴 때 마다 갑돌이 앞장서서 박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내밀었다. 세 사람은 한번 다녀간 주막이나 객사 등의 상호를 적어놓고 사흘 뒤에 다시 졸아보기로 했다.

“잘생긴 총각이구먼. 집 나간 아드님이신가 보네요.”

“미안해유. 그런 사람 본적이 없구만유, 참으로 잘 생겼네유.”

“워메! 헌헌장부일세. 집을 나갔나 보네요? 우리 주막에 들리면 집에서 찾는다고 알려줄게요.”

“미안합니다. 그런 분 우리 주막에 온 적 없습니다.”

박달을 찾는 일은 생각같이 쉽지 않았다. 이틀 동안 광통교, 애오개, 이현시장, 용산, 구파발, 숭례문, 다동 등 과객들이 묵을 만한 주막과 객사(客舍)를 모두 뒤지고 다녔지만 끝내 박달을 찾을 수 없었다. 봄을 재촉하는 진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오후, 일행은 마지막이라고 생각으로 처음 들렀던 지역부터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마포나루 근처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다섯 번째로 들린 곳이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이었다. 마침 박달은 바람을 쐬러 나가고 없었다.

“저 집은 우리가 들린 적이 없었지. 미포 나루 근처였는데 어째서 보지를 못했을까? 그때 우리가 꼼꼼하게 살펴봐야 했어.”

최대호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아저씨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이 잡듯 찾아보지요.”

갑돌이와 종철이 앞서 주막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아지가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디가 세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 왔다.

“어서 오세요. 잘 오셨습니다. 우리 주막은 마포나루 일대에서 가장 시설 좋고, 음식 맛 좋다고 소문난 곳이랍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주모, 여기 국밥 세 개, 탁주 세 사발 주시구려.”

색기(色氣)가 자르르 흐르는 아지는 일행을 보자 반색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주모, 혹시 이런 사람 보지 못했소.”

갑돌이 박달의 초상화를 내밀었다.

‘앗, 서, 서방님의 얼굴인데. 어째서 서방님 초상화가 이분 손에 있단 말인가? 혹시 박달서방님이 뭘 잘 못해서 포청에서 나왔나? 옷차림을 보니 기찰포교들은 아닌 듯한데? 이상하다?’

아지는 잠시 정신 몽롱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주모, 이 사람 본적이 있으시오?”

종철이 아지를 쏘아보았다.

“모,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 분과 어떻게 되는 사인데 찾으세요? 혹시 보게 되면 전해드릴게요.”

“이 사람은 이름이 박달이라고 내 사위 될 사람인데 과거보러 한양에 간 뒤로 반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어서 찾고 있소.”

“아이고, 선달님도 참! 애들도 아닌데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까봐 그러셔요? 조만간에 무슨 소식이 있겠지요?”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이 사람을 기다리는 내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소. 이 사람을 찾지 못하면 내 딸은 곧 죽게 됩니다. 혹시 이 사람을 보시거나 어디 기거하는지 알면 알려주시오. 부탁하오.”

아지는 최대호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얼굴은 서방님이 분명한데. 어찌한담? 여기 있다고 알려주면 당장 서방님을 데리고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터인데. 안 돼. 절대로 알려 줄 수 없어. 얼마 뒤 과거가 있고, 과거에 입격하면 나는 서방님과 혼인해야 하는데, 절대 알려줄 수 없어.’

아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이보시오 주모?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왜 그리 빤히 쳐다봐요?”

“아, 아니에요. 내가 잠시 어제 먹던 떡이 생각나서요.”

아지는 까르르 웃더니 엉뚱한 말로 둘러 댔다.

“이 도령을 보시거든 내 사정을 꼭 전해주시오. 부탁하오. 내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소.”

“선달님, 염려마세요. 우리 주막에 들리시면 꼭 전해 드릴게요.”

일행은 식사를 끝내고 서둘러 근처의 다른 주막들을 찾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그 도령을 꼭 찾기 바라요.”

아지는 문을 나서는 일행들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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