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순진한 벌말 어른들

“선달님,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박도령님은 나흘 전에 고향 풍산으로 내려가셨다고요. 고향 내려가는 중간에 따님을 만나러 평동에도 들린다고요.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선달님 말씀을 듣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주모 말을 믿어도 되는 거지요?”

최대호는 아지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선달님, 늘 속고만 사셨어요?”

“한 가지만 더 물어 봅시다. 박도령과는 어찌되는 사입니까? 그리고 박도령은 지난번 과거에 급제했습니까? 아니면 낙방했습니까?”

“그냥, 주모와 장기 투숙객 사이입니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셔요. 그리고 박도령님은 지난 가을에 치러진 과거에 낙방하셨습니다.”

“만약에 당신 말이 거짓이면, 내가 다시 마포로 올라와서 이놈의 주막을 불질러버리고 당신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각오해.”

종철이 아지를 노려보며, 협박하였다.

“우리는 빨리 벌말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딸애 상태도 궁금하구나. 혹시 박도령이 평동에 왔을지도 모르지. 일단 내려갔다가 박도령이 벌말에 들리지 않았다면 풍산으로 가보려고 한다.”

“어르신, 저 여자 말을 믿으세요?”

“그렇다고 저 여자를 어찌하겠니? 믿어보는 수밖에.”

최대호 일행은 보름 만에 평동 벌말로 돌아왔다. 그러나 박달은 벌말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최대호와 갑돌이는 가슴을 쳤다. 금봉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겨우 물 한 모금 넘기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급해진 최대호는 또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금봉이 앞으로 열흘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였다. 집안은 이미 초상집이 되어 가고 있었고 벌말 사람들도 최대호가 별 소득 없이 내려오자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인간 세상에 욕심은 없을 수 없지만, 다만 지나치게 되면 스스로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고 회한(悔恨)만 남게 된다. 오욕(五慾)은 평범하면 무리가 없다. 아울러 사람과 맺은 인연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 생명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과 맺은 인연 또한 중요하다.

“어이쿠! 금봉아. 애비가 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구나. 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야지.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찌하니?”

최대호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귀여운 외동딸이 이지경이 되도록 살펴주지 못한 죄책감에 그의 속을 시커멓게 멍들고 말았다.

“아버지, 죄, 죄송해요.”

딸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아버지는 귀를 가까이 대고 힘들게 이어가는 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옆에서 부녀의 눈물어린 모습을 바라보던 갑돌의 속도 타들어 갔다. 그녀는 하루 세 끼도 제대로 먹지도 못한 탓인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못해 핏줄이 파랗게 드러나 보였다.

"금봉아, 정신 좀 차려봐. 나 갑돌이야.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니? 보름 사이에 왜 네가 이렇게 변한거야? 정신 좀 차려봐. 나, 갑돌이라구.”

갑돌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가, 갑돌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정말 미안해.”

“안 돼. 금봉아, 어서 일어나야지. 박도령이 곧 올 텐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하니, 어서 일어나야지.”

갑돌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박달님은 나를 영영 잊으셨나봐.”

금봉이 가늘게 말을 이으면서 힘들어 했다.

“아버님하고 한양에 다녀왔어, 박도령이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일을 마치면 곧 내려온다고 약속을 했으니, 조만간 너를 보러 올 거야. 그때까지 정신 줄 놓으면 안 돼.”

금봉은 박달을 만났다는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 서방님! 어서 오셔요. 보고 싶어요. 복중에 아기가 이제 제법 잘 놀아요. 지금도 자꾸만 배를 차고 있어요. 어서 오셔요.’

갑돌이 손수건으로 금봉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핏줄이 불거져 나온 앙상한 손을 들어 살며시 갑돌이의 손을 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갑돌아, 나 죽어도 미워하지 않을 거지?”

금봉이 모기소리 만하게 속삭이자 갑돌이 얼른 금봉이 입에 귀를 갔다댔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소리에 갑돌은 긴장하였다.

“금봉아, 안 돼. 어서 일어나야 해. 옛날처럼 이등령으로 칡도 캐러 다니고 산머루도 따러 가야해. 네가 죽기는 왜 죽는다는 거야?”

“미안해. 박달님은 이제 영영 못 볼 것 같아.”

그녀의 말 한마 한 마디에 아쉬움과 여운이 짙게 묻어났다.

“아냐, 금봉아 힘을 내. 곧 오실거야. 내가 한양 갔다 오다보니 눈도 거의 다 녹고 계곡에 물도 졸졸 흐르고 있어. 꽃이 피기 전에 그분이 꼭 오실거야. 절대로 딴 생각하지 마.”

갑돌이는 금봉의 손을 참고 흐느꼈다. 이전에는 그녀의 손을 잡을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금봉이도 갑돌에게 미안한 마음을 체온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을 통한 감정이 갑돌의 심장에 전해졌다. 갑돌이는 금봉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대신해서 저승길을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돌아, 나를, 나를 용서해 주는 거지?”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면서 갑돌이와 대화를 나누려고 애썼다. 초점을 잃어 이미 이승의 사람 눈빛이 아니었다. 갑돌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또 가슴을 쳐야 했다. 금봉이 앞에서 차마 대성통곡하지 못하고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쁜 놈, 순진한 산골 처녀를 꾀어 저리 망가트리다니. 내 그놈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갑돌이가 통곡하자 수돌이가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갑돌아, 울지 마. 금봉이는 곧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거야. 너까지 이러면 어떻게 하니? 울지 마.”

“그놈은 천벌을 받을 거야. 천지신명님이 살아 계신다면 분명히 그놈 머리에 벼락을 내릴 거라고. 수돌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으니? 금봉이를 저렇게 내버려 두면 곧 죽게 될 텐데. 이일을 어찌해야 하니?”

수돌이가 아무리 갑돌이를 진정시키려 해도 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마을 어른들도 가슴이 답답한지 침통한 얼굴이었다.

‘괘씸한 계집이로다. 그 계집의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어찌한다? 풍산 땅으로 박도령을 찾으러가? 하지만 그가 정말로 고향으로 갔다면 벌말에 들렸을 것이야.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그가 과거에 낙방하였다고 하니, 면목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어. 허탕 치는 셈치고 풍산에 가보자.’

최대호는 갑돌이와 종철이의 부모에게 아들의 수고비로 이백 냥씩 건넸다. 갑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을 서로 차지하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최대호는 이번에는 갑돌만 데리고 풍산으로 향했다.

“아저씨, 풍산까지 어떻게 가실건가요?”

“내가 소싯적에 안동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 안동 못미처서 풍산이 있단다. 봉양(鳳陽), 제천을 거쳐 단양, 풍기(豐基)를 지나면 예천(醴泉)이 나오는데 거기서 아랫녘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바로 풍산 지방이란다.”

“왕복 얼마나 걸릴까요?”

“걸어서 닷새나 엿새정도 걸리는데, 지금 시간이 없잖니. 그래서 봉양에서 한양 갈 때처럼 마차를 타고 가려고 한다. 빠르면 이틀 안으로 갈 수 있을 것이야.”

갑돌이는 풍산을 다녀오는 사이에 금봉이에게 변고라도 일어날까 걱정이 되었다. 새벽에 평동을 출발한 두 사람은 부리나케 남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에 봉양에 도착한 마차로 임대하여 남으로 내달렸다.

“마부 아저씨, 저희는 풍산까지 가는데 한시가 급합니다.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사람 목숨이 달려 있어요. 풍산에 가서 사람을 데려와야 합니다.”

갑돌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려 있었다.

“풍산까지 내일 안으로 도착할 수 있지요?”

“빨리 달리면 내일 안으로 충분합니다.”

금봉의 아버지 말에 마부는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금봉의 아버지와 갑돌이 탄 마차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풍산을 향해 달려갔다.

“나쁜 사람. 평화롭던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다니. 그냥 잠이나 자고 가던지, 쓸데없이 순진한 산골 처녀를 건드려서 저리 만들어 놓았누? 저 일을 어쩌면 좋아.”

나이가 지긋한 마을 어른이 궐련을 빨아대며, 허탈한 심정을 감추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대호는 그 박달인지, 복달인지를 하룻밤만 재우고 보낼 것이지, 쓸데없이 여러 날을 재워 보내 이런 사달을 만들었나 그래. 요즘 젊은 것들이 마음만 맞으면 금방 배꼽을 맞춘다는데, 대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자업자득이야. 누구를 탓할 거야.”

마을이 금봉의 일로 술렁이자 마을 이장은 반장과 원로들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러분들도 소문을 들어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 마을 처녀 금봉이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각 집안에서는 더는 금봉이 관련한 흉흉 소문이 번지지 않도록 각별히 입조심 하도록 하시고, 과년한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딸들의 행동과 몸가짐에 신경을 써서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각 반장들은 오늘 회의 내용을 신속히 전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로 여러분께서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지요.”

“에헴, 내 한마디 하겠소.”

원로 한 분이 일어나더니 뜸을 들이다 한마디 했다.

“작금의 일을 보면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이웃 간의 정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금봉이네가 농사도 많고 이 동네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네에 과객이 오면 제 발로 금봉이네를 찾아가거나 다른 집에 가도 금봉이네로 인도하는 바람에 음으로 양으로 금봉이네가 마을로 들어오는 과객을 도맡아 재우다시피 했습니다. 이번일도 금봉 아버지가 인심이 후한 탓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금봉이가 시집도 못간 상태에서 아이를 배고 이제는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들었어요. 이일은 금봉이네에 한정 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을의 남정네들이 못나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금봉이네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을의 원로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은 금봉에 대한 험담을 멈추고 측은한 심정으로 봉양댁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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