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지의 욕심

폭풍전야처럼 벌말은 침묵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온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까지 금봉이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밤이면 동네 총각들은 과수댁 선술집에 모여 박달을 성토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술로 울분을 삭히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돌이는 다른 사내들보다 많은 술을 마셔댔다.

“금봉이가, 금봉이가 불쌍해. 소문을 들으니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해.”

수돌이 큰 소리로 통곡하자 종철을 비롯해 마을 사내들은 침울한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어떤 사내는 대취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한양으로 박달을 찾으러 떠나자고 하였고, 또 한 총각은 가짜로 박달을 만들어 꺼져가는 금봉을 살리자는 제안도 하였다.

머무를 곳을 안 뒤에야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림이 없는 뒤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 생 각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극락에서 돌아온 박달은 아침, 점심, 저녁 끼니때를 제외하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아지는 그런 박달이 믿음직스럽고 대견해 하면서 이번 별시에 반드시 입격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박달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여 뒷바라지 하였다. 아지는 박달이 묶고 있는 방의 옆 봉놋방은 손님도 들이지 않은 채 비어 두어 그가 공부 이외에 신경이 쓰이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였다. 공부하는 중간 중간 박달은 금봉을 생각하였다.

박달은 금봉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괴로웠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어두고 공부에 전념하려고 하여도 요즘 들어 자꾸만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봉이, 조금만 더 기다려주오. 하루도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오. 내 이번 별시를 끝내고 바로 벌말로 바람처럼 달려가리다. 그때 까지만 기다려 주오.’

박달이 공부하다말고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그녀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움이 일어 가슴이 미어지고 죄책감에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있는 수수하고 청초한 꽃 같은 금봉이였다. 자나 깨나보고 싶은 그녀의 배시시 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롱거렸다.

금봉이에 비하면 아지는 만개한 장미처럼 화려함을 추구하려 들고 욕심이 철철 넘쳐흐르는 여자였다. 박달은 만약 이번에 별시에 입격하게 되면 그동안 아지가 자신을 위하여 뒷바라지 해 준 것을 고향에 다녀와서 금전(金錢)으로 해결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물론 아지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지만 금봉을 향한 일편단심이 변함이 없기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 아지의 계획된 접근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지 또한 자신의 과거(科擧)에 대한 한 풀이를 위하여 박달을 이용하려 한 것 일뿐, 순수한 남녀의 정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박달이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아지를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도 있겠지만, 과거에 낙방한 입장에서 무일푼의 신세로 전락해 오도가도 못 할 처지에서 아지에게 의지할 수밖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박달은 자신의 그런 행동에 충분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금봉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중에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면 금방 나를 잊을 여자야. 그러나 금봉은 나에게 모든 것을 준 순수한 여자야. 아지를 버리더라도 그녀를 잃을 수 없어. 아, 빨리 별시가 끝났으면......’

박달은 이번에는 꼭 급제하여 벌말로 달려가는 상상을 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박달이 책 읽기에 몰두 해 있을 때 아지가 시원한 식혜를 한 그릇 정갈하게 담아 가져왔다. 한가한 오후라 손님이 뜸했다. 박달은 아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여인들의 남자에 대한 진정한 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얼마든지 남자를 이용할 수 있고 뜻한 바를 위하여 불나비처럼 달려들어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스스로 불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여인들이 한양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서방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지가 눈을 내리 깔고 수줍은 표정으로 박달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니요. 그대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요.”

“아이, 서방님도. 정말이지요?”

“정말이고말고.”

박달의 말에 아지는 금방 얼굴이 빨개지면서 화끈 달아올랐다. 여러 달을 함께 하면서 박달에게 처음으로 들어보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서방님, 소주 한 잔 하시겠어요? 마침 봄비도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런 날 술 한잔 하시면 만사가 술술 풀리죠.”

“지금 공부 중인데 어찌 술을 마신단 말이오?”

박달도 술 생각이 나긴했었다.

“오늘 새로 들어 온 술인데 아주 귀한 술이에요. 서방님께서 하루 종일 방에서 공부만 하시니 머리도 아프실 것 같아서 딱 한잔만 드시고 긴장을 푸시라고요.”

“공부해야하오. 내 이번에는 꼭 입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줘야 하오. 이번에도 낙방한다면 난 과거에 미련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 한 세상 살 작정이오.”

박달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서방님, 어찌 그런 말씀을? 서방님은 이번에 꼭 입격하시어 이름을 높일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씀마세요. 듣는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알겠소. 내 그런 말은 다시 하지 않으리다. 그럼, 딱 한잔만 하리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파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 생각 중이었소.”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주안상 차려 올게요.”

아지는 나가자마자 조촐하게 주안상을 준비하여 가져왔다.

“딱 한 잔만 할 건데 이렇게 진수성찬을 가지고 오면 어쩌오?”

“아이, 서방님도. 저도 마셔야지요? 서방님과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술 생각이 간절해요.”

아지는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박달에게 건넸다.

“미안하오. 내 지난번 낙방한 충격을 받아 공부만 하느라 그대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나를 이해 해 주시구려.”

“아니어요. 제가 괜히 해본 말이에요. 서방님, 저도 한잔 주셔요.”

박달이 술을 따르면서 아지의 얼굴을 새삼스레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 아니요. 그대는 볼수록 매력적인 여인이오.”

“아이참, 서방님도.”

아지는 박달의 무엇인가 아쉬워하는 얼굴빛에서 며칠 전 다녀간 최대호 일행을 떠올렸다.

‘금봉이란 처자가 서방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만약 내가 금봉이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하면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치고 바로 그 처녀에게 달려 갈건 데. 아, 어쩌나?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같은 여자끼리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서로의 다른 입장을 지켜야 하는 것도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 쯤 어쩌면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야기 하면 내가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도루아미타불이 될 테지. 할 수 없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하지만 나중에 서방님이 우리 주막에 그녀의 아버지가 다녀갔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심하게 질책을 할 텐데…….’

아지는 금봉이 아버지가 다녀간 뒤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박달에게 처음 금봉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잠시 산골 처녀와 불장난을 했으려니 생각하였으나, 지금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최대호의 이야기를 듣고 아지는 우울해 졌다. 자신이 아무리 온갖 정성을 다해 박달을 뒷바라지 하고 있지만 만약 별시에 합격하고 나면 금방 금봉이에게 달려 갈 것만 같았다.

“아니, 아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듯하오?”

박달은 아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 같아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나에게 뭐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봐요. 내 무슨 이야기든 들어 줄 테니.”

‘아, 어쩌나? 이야기를 할까 말까?’

아지는 주저하면서도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저어, 서방님.”

"말해보오. 무슨 이야기도 상관없어요."

“먼저 말씀하신 그 처녀 말씀이에요.”

“그 처녀? 아, 시랑산 아래 평동 벌말에 사는 금봉이 말이오?”

“네에. 그 아가씨는 지금도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봅니다. 죄송해요.”

박달은 요즘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의 정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오. 괜찮아요. 과거에 낙방한 처지에 찾아갈 수도 없는 내 마음을 그녀가 이해해 주겠지요."

박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지는 또 물었다.

“서방님, 이번 별시에 서방님의 입격(入格)은 따 놓은 당상인데 합격증서를 가지고, 바로 그 아가씨에게 달려 가실건가요?”

‘아니, 아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물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나를 그냥 순순히 그녀에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지.’

박달은 딱 한 잔만 마시겠다고 하였지만 아지가 금봉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만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아파 한 잔을 달라고 하였다.

“아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소. 그대 역시 나의 과거 입격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데, 만약 내가 입격하고 나면 나는 한참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소. 아직은 나도 앞으로의 일을 잘 모르겠소.”

박달이 술잔을 비우면서 우울해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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