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박달의 고향, 풍산을 가다

“서방님, 이번 별시가 끝나면 금봉 낭자에게 다녀오세요. 그러나 지금은 안 됩니다. 만약 서방님께서 여기서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허사(虛事)가 됩니다. 그러니 이번 별시가 끝나면 속히 벌말에 다녀오세요. 그리고 복시도 준비하셔야 하잖아요.”

‘이 여인이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내가 입격하고 나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안 놓아 줄줄 알았는데, 금봉에게 다녀오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박달이 잔을 비우고 아지에게 잔을 건넸다.

“자, 그대도 한 잔 받아요. 그리고 방금 한 말 진담이지요?”

“제가 언제 서방님께 거짓말 하는 거 보셨어요? 진담이니 개의치 마시고 다녀오세요.”

“고맙소.”

아지는 금봉의 아버지가 한 말을 떠 올리며, 나름대로 자신의 앞일에 대하여 숙고해 보았다.

‘그녀의 상사병이 깊어 오래가지 못 할 것이야. 별시 끝나고 서방님이 벌말까지 가려면 아직 보름 정도는 더 있어야 해. 그렇다면 그녀는 그 안에 세상을 하직하게 되겠지. 그녀가 이승 사람이 아니거늘 서방님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곳에서의 인연을 정리한 뒤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겠지. 그리 될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가지 말라고 붙잡을 필요 없어.’

아지는 속으로 웃으며 박달이 건네 준 잔을 단숨에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燒酒) 맛이 참으로 기가 막히네요. 서방님이 손수 따라 주시니 맛이 더 좋은 것 같네요.”

박달은 아지에게 술을 따라주며 흡족해 했다.

“아지, 보기보다는 마음 씀씀이가 웬만한 사내보다 넓구려. 고맙소.”

수심이 가득했던 빅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방님, 별 말씀을요? 모두가 서방님의 홍복(弘報)이지요. 저는 단지 뒤에서 서방님의 청운의 꿈 실현을 위해 품을 좀 팔았을 뿐이어요. 이번에 꼭, 꼭 합격하셔야 해요. 먼저는 운대가 안 맞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합격하실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녀는 박달의 급제를 확신하는 눈치였다.

“아지가 그리 말해주니 힘이 나는 구려. 자, 어서 마시고 한잔 더 주시구려.”

“서방님, 한 잔만 드신다고 하시고?”

“난, 원래 술에 강한 체질이라 술 서너 잔은 끄떡없어요. 괜찮소.”

박달이 빈 잔을 내밀었다.

“그럼, 딱 두 잔만 더 드시고 공부하셔요.”

“알겠소. 그리고 내 그동안 나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그대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수고는 보상받게 될 것이오.”

“서방님,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아지는 박달의 말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소주 한 주전자 금방 비워지고 말았다. 박달도 서너 잔 정도는 무난하다고 하였으나, 소주는 탁주보다 서너 배 이상 독했기 때문에 금방 취하고 말았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팠던 머리가 더 아프니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잠 자고 나면 깨겠지.’

“서방님, 피곤해 보이세요.”

“잠시 눈 좀 붙였다가 공부해야 겠어요.”

“저는 낮술은 잘 안 하는 편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금방 취하네요. 아마 서방님과 함께 마시니 속이 금방 뜨거워 졌나봐요?”

박달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아지는 음심을 간신히 억누르며 방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금봉아, 엄마다. 정신 좀 드니?”

“어, 어머니.”

“그래, 엄마야. 정신 좀 드는 거여?”

금봉이 가늘게 눈을 뜨자 밤새 곁에서 병간호 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하고 앙상한 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금봉은 잠깐 잠이 들었다가 금방 깨기를 반복하면서 ‘서방님’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그녀 고모와 이모들 그리고 먼 친척들까지 금봉이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다.

“어머니.”

“응,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니? 천천히 말해보렴.”

“바, 박달도령님, 아직 안 오셨지요? 방금 전에 도령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어요.”

금봉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에구, 에구! 그 사람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 사람이 왔으면 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을 텐데…….”

‘아아, 이제 영영 서방님을 볼 수 없겠구나.’

금봉의 두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자 그녀의 어머니는 속이 쓰렸다. 차마 죽어가는 딸 앞에서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아이고, 그 박달인지 복달인지는 다리가 없는 거여? 손이 없는 거여? 산골 순진한 처녀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놓고서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거여. 사정이 있으면 인편에 편지라도 써서 보내면 될 거 아녀. 우리 집안이 그 사람에게 무슨 원한을 졌기에 이리도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여.”

어머니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금봉은 또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모녀의 흐느낌을 지켜보던 금봉의 고모와 이모들은 이구동성으로 박달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작자가 과거에 입격하여 장차 높은 벼슬아치가 된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찌될꼬? 참으로 한탄스럽고 원통하구나.”

성질 급한 금봉의 이모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댔다.

“그 놈이 분명 한양에서 다른 여자 치마폭에 쌓여 과거고 뭐고 다 포기하고 파락호가 된 게 분명해. 삼 개월 후면 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반년이 넘도록 안 나타는 거 보면 뻔할 뻔자여. 나쁜 놈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금봉이 큰고모가 눈물을 찔끔 거리며 욕을 해댔다.

“금봉이가 좀 어떻대요?”

“글쎄,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며칠 못 갈 것 같다고 하네. 에구, 어린 것이 정 한번 잘 못 줘다가 그리되었으니 부모들이 얼마나 원통할꼬.”

“그러게, 앞으로는 우리 마을에서 과객들을 재워주지 말아야 해요.”

“이등령을 넘나드는 과객들이 길을 잃거나 밤이 되면 마을로 들어오는 데 어지 막누. 마을에서 공동으로 주막을 지어서 운영하던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금봉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불쌍해서 어쩌누.”

마을 아낙들은 처음에는 금봉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마을 원로들의 부탁도 있었고,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에 그녀를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혹시 이 고장에 향교가 어디 있습니까?”

마차 편으로 봉양을 출발한 두 사람은 다음날 오후에 풍산에 도착하였다. 금봉의 아버지와 갑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향교의 소재지를 물었다. 박달이 과거를 준비한 유생이라면 향교에 적을 두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안동향교와 예안향교(禮安鄕校) 두 군데 있어요. 어느 향교를 찾는데요?”

두 사람은 즉시 가까운 향교를 찾았다. 그러나 그 향교에는 박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해질 무렵 다른 곳에 있는 향교를 찾았다.

“내가 박달을 지도한 훈도(訓導) 올시다. 두 분은 어찌 그 애를 찾소?”

중년의 남자가 두 사람을 이상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게, 저어-.”

최대호가 주저하자 갑돌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다. 훈도는 갑돌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라워하였다. 지방향교의 교관에는 교수(敎授), 훈도(訓導), 교도(敎導)가 있었다. 그들은 문과 출신인 삼관권지(三館權知)로 종6품인 교수관, 참외는 종9품인 훈도관, 생원, 진사는 교도로 불렸다. 즉, 문과 급제자 중 실직에 제수된 자를 제외한 모두를 재평가하여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 등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제수한 조선의 인사제도였다. 권지는 임용 대기 중인 견습 관원이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 애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 무척 궁금해 하던 차였습니다. 지난번 증광시(增廣試)에 불합격한 뒤로 얼른 귀향하여 다음에 있을 별시(別試)를 준비해야하는데 나타나지를 않아 애를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갑돌은 금봉과 관련한 이야기만 하였다. 훈도는 박달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듣다가도 금봉과 장래를 약속했다는 말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훈도가 보통 남녀의 연애 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사실대로 모두 이야기를 해야겠어.’

금봉의 아버지는 한양에서 알게 된 박달과 아지의 관계를 말하자, 훈도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최대호는 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박달의 소재를 물었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그 애가 나타나지를 않으니, 나도 그 애 소식을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사병은 당사자가 있어야 낫는데…….”

“훈도님, 박달이 어떤 유생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갑돌의 요구에 훈도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최대호가 재차 물었다.

“박달은 고향이 풍산이지만 이곳에 와서 십년간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애의 실력은 최고입니다. 향시(鄕試) 예비시험을 보면 항상 장원을 차지하였습니다. 내가 지도한 유생이지만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과거에 낙방한 사실을 알고 이 지역 인사들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훈도는 박달에 대한 칭찬을 이어 나갔다. 최대호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박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훈도님, 박도령의 집을 가보고 싶습니다. 혹시 고향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박도령 고향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십시오, 초면에 자꾸 부탁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 여식(女息)의 생명이 명재경각(命在頃刻) 처해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최대호가 통사정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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