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금봉이의 유언

“유생들이 공부를 하고 과거(科擧)를 일생의 목표로 삼는 일은 장차 벼슬을 하면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박도령의 집을 알려주십시오. 부탁합니다.”

훈도는 창호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박달의 고향 집 위치를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풍산으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 두 사람은 물어물어 박달의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그의 고향 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고색창연한 기와집이었다.

“뉘신데 우리 아들을 찾습니까?”

“저희들은 제천서 박도령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 애는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고 집에 없습니다. 그런데 댁들은 뉘신지요?”

“지, 집에 없다고요?”

최대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이가 꽤들어 보이는 초로(初老)의 여인이 대문을 열었다. 갑돌이 찾아온 연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멀리서 오신 손님이시니 들어오세요.”

그녀는 조쌀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도저(到底)해 하면서도 인정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 소식에 애를 태우고 있던 차에 한양까지 올라가 아들이 어찌 지내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한편으로는 놀라우면서도 반갑기도 했다.

“저는 제천 평동 벌말에 사는 최대호입니다. 제 딸의 이름은 금봉이라 합니다.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이 복중에 박씨 가문의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최대호는 재차 딸과 박달 사이에 있었던 사연을 소개하였다.

“네에? 댁의 따님과 우리 아들이 장래를 약속한 사이며, 복중에 박씨 가문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고요?”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아들이 큰 죄를 지었군요. 댁의 따님은 곧 제 며느리인데, 거기다가 임신까지 했다니. 어미로서 어른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 역시 아들에게서 소식이 없어 속을 끓이던 중이었습니다.”

“아들이 어르신께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만 드렸습니다. 제가 어미로서 아들의 죄를 대신해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일어나 금봉의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외아들로 태어나 외롭게 자랐습니다. 아버지을 어려서 여의고 홀어미 품에서 자랐습니다. 남달리 공부를 잘하여 아들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지난 증광시에 낙방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고향으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여비도 다 떨어 졌을 텐데 걱정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죄송하지만 박도령의 선조님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최대호는 정중히 박달의 조상에 대해 물었다.

“네에, 이왕 이리 된 것을 저희 집안 내력을 말씀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땅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애 고조부께서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 이후 단종 임금 복위사건 때 연루되어 한직(閑職)으로 전전하시다가 낙향하여 지방을 떠도셨답니다. 백여 년 전에 식솔들을 거느리시고 이 풍산에 자리를 잡고 가문을 새롭게 일으킬 터전으로 삼으셨지요. 후손들도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가문을 부흥시킬 꿈을 꾸었답니다. 아들이 지난번 과거에 꼭 급제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 아이에게 운이 없었나 봅니다. 저는 아들의 실력을 믿습니다. 그 아이는 안동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에서 실력이 가장 출중하다고 소문났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낙방하였다는 것은 집안의 조상들과 관련한 오랜 정치적 배경이 한몫을 한 게 아닌가 합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박달의 어머니는 탄식을 하면서 아들이 낙방하게 된 이유를 조정의 일부 오리(汚吏)들이 개입했다고 믿고 있었다.

“사부인, 고맙습니다. 집안 내력을 말씀해 주시니 답답한 심정이 조금 가시는 느낌입니다.”

최대호 아버지 역시 조상의 불운(不運)을 떠올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7대조 할아버지가 지방의 고위직에 있을 때 부하의 무고(誣告)를 받아 벼슬에서 파직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어 가문이 풍비박산 난 뼈아픈 가족력이 있었다.

“따님이 지금 상태가 안 좋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습니다. 혹시 박도령이 딸을 찾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례하였습니다. 저희는 이만 고향으로 가보겠습니다.”

최대호와 갑돌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이 밤에 어찌 가시려고요? 주무시고 내일 아침 일찍 가시지요?”

“아닙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가봐야 합니다. 딸이 기지사경에 있습니다.”

최대호와 갑돌은 마차에 올라 북쪽으로 향했다. 맑은 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리는데 금방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동천에서 보름달이 올라오고 있어서 밤길을 밝혀 주었다.

“어머니.”

“그래, 금봉아, 엄마 여기 있다.”

금봉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머니, 저 죽고 나서 박달님이 찾아오시더라도 박대하지 마세요. 못 오시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네가 죽긴 왜 죽어? 내가 어쩌다 이런 열녀(烈女)를 낳았을꼬. 어미도 살아 있는데 젊은 네가 왜 죽는다는 거야.”

봉양댁은 가슴을 쳐댔다.

“금봉아, 그런 말하면 못써. 네가 죽긴 왜 죽겠다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박도령이 올 거야. 며칠 전에 아버지가 한양에 가서 박달을 만났다고 하잖니. 그 사람이 오면 네가 집 밖에 나가 맞이해야지. 그 사람이 왔는데 네가 없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황당하겠니?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 예전처럼 지내야 해. 금봉아, 이 고모 말 알아들었니?”

이번에는 둘째 고모가 금봉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어머니.”

“그래, 엄마 여기 있다.”

“나 죽은 뒤에 박달님이 오시면 따뜻하게 밥해서 드리세요. 찬밥 드리지 말고 따뜻하게 밥해서 드려야 해요.”

“어이구, 어이구! 왜 자꾸만 죽는다는 거야? 네가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차려주면 될 거 아니니. 그 사람이 내가 차려주는 밥보다 네가 차려주는 밥을 더 기분 좋게 먹을 거 아니냐.”

“어머니.”

“그래, 어서 말해봐.”

금봉은 점점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저, 저, 시집갈 때 혼사품 사려고 준비하신 거. 박도령님 오시거든 모두 드리세요.”

“뭐여? 두들겨 패도 시원찮은 판에 네 혼사 품들을 왜 그 사람에게 주라는 거니?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과 혼례식 올리면 되잖니?”

딸의 말에 어머니는 잠시 발끈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전, 전 이미 틀린 거 같아요.”

금봉은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간간히 몰아쉬는 숨소리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 같기도 했다.

“금봉아, 무슨 말이야. 넌 일어날 수 있어. 그런 말 하지 마. 희망의 끈을 놓지 마. 너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 그분을 만나야 해. 곧 올 거라고 하잖니.”

금봉의 큰 고모가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고모, 이모, 갑돌아…….”

“그래, 엄마 여기 있다.”

“아버지, 아버지는요? 갑돌이 하고…….”

“아버지하고 갑돌이는 박도령이 마중하러 제천에 나가 계시 단다.”

그녀는 유언이라도 남길 것 같아 어머니와 고모들 그리고 친인척들이 금봉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그들은 숨소리를 죽이며 금봉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제가 죽으면 이등령 꼭대기에 묻어주세요. 꼭 거기에 묻어주셔야 해요.”

금봉이 간신히 말을 하고 두세 번 숨을 몰아쉬었다.

“이것아, 그게 무슨 말이여?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왜 자꾸만 죽는다는 말을 하는 거야?”

봉양댁은 딸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쁘고 귀여운 딸이었다.

“어머니, 이거, 이거 박달님께 꼬옥-.”

금봉이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더니 박달이 헤어질 때 건네준 옷고름과 편지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금봉아! 금봉아! 정신 차려.”

“금봉아, 정신 차리거라. 잠들면 안 된다.”

봉양댁은 사람을 시켜 의원을 부르게 했다. 급히 달려온 마을 의원 박씨가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숨이 가늘게 이어지고 있겠구나. 금봉이 아버지도 집에 없다고 하는데, 이대로 하직하면 어쩌나?’

박씨가 심각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자 봉양댁과 친인척들은 답답해했다.

“의원님, 어때요? 호전되겠어요?”

박의원이 말이 없자 봉양댁이 물었다.

“글쎄요. 좋아질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을 것도 같고…….”

박씨가 아리송하게 대답하자 봉양댁과 친인척들은 혼란스러웠다.

“금봉아, 금봉아! 엄마다. 정신 차려. 잠들면 안 돼.”

“금봉아, 잠들면 안 된다. 정신줄 놓으면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고모들이 애가타서 금봉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