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박달, 정인(情人)에게 달려가다

“금봉이가 저렇게 허망하게 갔으니 갑돌이가 충격을 받았을 텐데. 저 일을 어쩌나? 금봉이가 다른 씨앗을 품고 있어도 갑돌이 금봉이를 탓하지 않고 더욱 애틋하게 생각했다는데. 저러다 갑돌이도 잘못 되는 거 아녀?”

“그거참! 미꾸라지 한 마리가 몰래 기어들어와 온 동네를 슬픔에 잠기게 하였어. 그러게 타지 사람을 함부로 재우는 게 아니었어. 앞으로는 또 저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절대로 낯선 과객을 집안에 들여 재우지 말아야 해.”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은 금봉이 아버지가 안 되었네 그려. 좋은 사윗감을 고르려고 무진 애를 썼건만…….”

마을 사람들은 모닥불에 빙 둘러서서 마을 처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제각기 한마디씩 하였다.

시랑산 이등령에 진달래를 비롯한 봄꽃들이 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마친 듯 봄기운이 완연해 보였다. 남녘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화신(花信)이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전해지고 있었다. 개구리들이 햇볕이 드는 계곡 마다 알을 낳고 산짐승들도 기지개를 켜면서 산의 정령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서방님, 금봉이옵니다. 어찌 아니 오시는지요? 서방님을 기다리다 지쳐 병이 들었나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이등령에 올라 서방님 오실 날만 기다렸습니다. 서방님, 보고 싶어요. 그러나 서방님께서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으셔서 못 오시는 줄로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서방님, 제 모습이 보이시죠? 이 배 좀 보셔요. 서방님의 아기가 무럭무럭 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먼 곳으로 가서 아기와 함께 살아 갈 거예요. 나중에 서방님께서 오시면 우리 아기와 마중 나갈게요. 서방님과 이루지 못한 미완의 사랑은 한으로 남을 것 같아요. 서방님, 먼저 가오니 내내 강건하사옵고 꼭 큰 뜻을 이루셔요. 혹시라도 고향가시는 길에 이등령을 잘 살펴보시어요. 제가 우리 아기와 이등령에서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서방님께 하직인사 올립니다. 절 받으세요. 서방님…….”

“헉-, 금봉아, 금봉아, 안 돼. 안 돼. 어딜 간다는 거야? 안 돼. 안 돼. 금봉아,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거기 서. 안 돼. 안 돼…….”

머리를 산발하고 소복(素服)을 입은 금봉이 남산만 한 배로 박달을 찾아왔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머금은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박달은 손을 허공으로 휘저으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방님, 서방님, 주무시다 말고 웬 잠꼬대를 그리하세요? 어머나, 이 땀 좀 봐. 악몽을 꾸셨나 봐요?”

박달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아지가 방으로 뛰어 들었다.

‘아아, 이상한 일이로다. 그녀가 머리를 풀고 소복을 입은 채 나타나다니, 분명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아지, 지금이 어느 때요?”

“서방님, 한밤중이에요. 주무시면서 금봉낭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셨어요. 그것도 아주 애절하게요. 악몽을 꾸셨나 봐요?”

"내가 그랬소?"

아지는 금봉에게 별고가 생긴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박달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서방님, 오랜만에 술을 드셔서 그런가 봐요? 한 밤중이니 더 주무시고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세요. 밤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그냥 주무세요. 내일 새벽에 깨워드릴게요.”

아지가 방에서 나가자 박달은 밖으로 나왔다. 마침 새벽달이 막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달 속에 그녀의 슬픈 모습이 어리비치고 있었다.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하구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 게요? 어째서 소복차림으로 나타난 게요? 그대를 보고 싶어 벌말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과거에 낙방하여 돌아갈 수 없었소. 금의환향해야 하는 이 몸은 절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었소. 용서하오.”

새벽달이 서산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한 어둠속으로 묻혀버렸다. 박달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녀가 소복을 입은 그녀의 배가 남산만 했어. 그렇다면 그녀가 임신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내가 벌말에 열흘 정도 머물고 있을 때 우리는 여러 차례 사랑을 나누었어. 그렇다면 그때 아기 씨앗이? 아아, 안 되는데.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면 동네에서 내 쫓기거나 망신을 당할 텐데. 이일을 어쩌나? 현몽(現夢)하였으니, 그냥 있을 수도 없고. 소복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입는데, 어째서 그녀가 흰옷을 입고 있었단 말인가?’

박달은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꿈속에 나타난 금봉이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방금 전에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어쩌나? 분명 그녀에게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한데……. 과거보다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해. 그녀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어. 과거는 다음 기회에 보면 돼. 내가 여기서 별시 준비를 하여도 그녀가 현몽한 이상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을 거야. 빨리 벌말에 다녀와야 하겠어.’

박달은 꿈속에 나타난 금봉이의 자신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너무 애절하고 빨리 가보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 같았다.

‘아깝지만, 이번 별시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금봉이의 마음을 안정시켜 놓고 다시 올라와서 공부해도 될 거야.’

그는 금봉이와 헤어질 때 그녀가 건넨 복주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괘나리 봇짐에서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복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비단 주머니를 열고 속 내용물을 꺼냈다. 복주머니 안에서 부적 하나와 분홍색지가 나왔다.

‘이것은 나의 입신양명과 부부의 사랑 그리고 두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문구인데…….’

분홍색 종이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이성지합(二姓之合), 거안제미(擧案齊眉), 해로동혈(偕老同穴), 천고방명(千古芳名), 양문창성(兩門昌盛)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한시(漢詩)처럼 쓰인 글에 박달은 감동하였다. 이성지합은 남녀의 혼인을 의미하고, 거안제미는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이야기로 금슬 좋기로 이름 난 양홍(梁鴻)과 그의 처 맹광(孟光)의 고사이며, 천고방명은 장원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길이 남기라는 의미이며, 양문창성은 두 가문의 번성함을 의미 했다. 박달은 괴나리봇짐을 챙기고 아지에게 편지를 썼다.

꿀맛을 잘 알지 못하는 나비 한 마리

어쩌다 갈 길을 잃고

한 여름 꽃에 잠시 앉았다 가오

그대가 나비였고, 나 역시 잠시나마 꽃이었었소

천 길 낭떠러지에 절벽에 핀

화사한 꽃에 앉아 편히 꿀을 맛본 벌은

이제 창공(蒼空)을 향해

자유로운 날갯짓을 마음껏 펼치려 하오

꿀맛을 모르는 나비 한 마리

이제 첫 입맞춤을 그리며 훨훨 날고자 하오

-박달-

박달은 알쏭달쏭한 짧은 글을 써놓고 아지의 주막을 나섰다. 새벽길에 개가 뿌옇게 깔려있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새벽일 나가는 사공들과 두부장수 그리고 지방에서 올라 온 장사치들과 한양의 상인이 나루터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직 산간 지방에는 얼음이 남아 있는 탓에 한양에 올 때처럼 배편을 이용해 목계나루까지 가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언젠가는 나를 보살펴 준 대가를 꼭 보상을 하리라. 내가 그녀의 치마폭에 있는 한 되는 일이 없을 것이야. 왜,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을까? 오로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나를 희생시키려 하는 그녀의 음모를 알면서 나는 왜 모르는 척 했을까?’

차가운 새벽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박달은 안개에 휩싸인 새벽을 헤치며 남녘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이번에는 걸어서 벌말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한양에서 제천 평동까지 어른 걸음으로 열흘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금봉의 아버지는 마을의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딸의 장례를 내일 아침 일찍 치르기로 했다. 금봉의 어머니, 고모, 이모가 시신이 안치 된 그녀의 방에 들었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고통 속에 일그러졌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봉양댁은 염(殮)을 하기 위해 딸의 옷을 모두 벗기고 물수건으로 시신을 닦아 주었다. 봉양댁은 불룩한 딸의 배를 살며시 만져보다가 깜짝 놀랐다. 미미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뱃속에서 태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아, 이런, 이런,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올케, 올케, 울지 마셔요. 어차피 금봉이는 갔는데 올케라도 정신을 차려야지요.”

“고모, 고모, 금봉이 배 좀 만져 봐요.”

뱃속에서 아기가 꿈틀대는 것을 만져 본 고모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였다. 봉양에서 여자 염꾼 두 명이 초빙되어 염할 준비를 서둘렀다. 염꾼들은 시신의 태중에 방금 전까지 아기가 꿈틀거렸다는 말을 듣고 머뭇거렸고, 마을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안타까워하였다.

“아아, 어찌할까? 어찌해야 살아있는 사람들이 천벌을 받지 않을까? 금봉아, 금봉아…….”

고모, 이모, 그리고 인척들이 몰려들어 안타까운 광경을 지켜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지만,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 천지신명님이시여. 어찌해야 하나이까?”

금봉의 아버지도 방으로 들어와 통곡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금봉의 어머니가 딸의 배를 만져보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금봉아, 아가……. 이 어미를, 이 할미를 용서해다오.”

염을 시작하려고 하자 금봉의 어머니는 그만 기진맥진하여 자리에 눕고 말았다. 동네 어른들과 젊은 남자들은 집 앞마당에 쳐놓은 천막에서 밤을 새우고 낮에도 술잔을 비우며 망자(亡者)와 박달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금봉이 부모와 친인척 그리고 갑돌은 염을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망자의 얼굴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잠든 듯 누워있는 금봉이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 한 번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였다.

“금봉아, 저승에 들거든 박달처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내와 는 절대로 인연을 맺지 말거라. 이승의 무거운 짐을 훌훌 털고 잘 가거라.”

봉양댁은 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몸부림 쳤고 최대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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