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소슬한 달밤 누구를 생각하시나요

“금봉아, 이 미련한 아비를 탓해다오. 이 욕심 많은 아비를 용서해다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하구나.”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편안한 모습으로 영면에 든 금봉이의 눈가에 말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봉아, 원통해서 어이할꼬. 억울해서 어찌 이승을 떠날꼬.”

그녀의 고모와 이모들은 울며 몸부림 쳤다.

“금봉아, 미안하다. 내거 너를 지켜주지 못했구나. 부디 좋은 데로 가서 편히 쉬어라. 미안해,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갑돌이는 소리 내어 울면서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염을 마친 망자의 시신이 부모와 여러 친지들이 보는 가운데 입관되었다. 박달이 이별 할 때 그녀에게 건네준 옷고름도 관속에 넣어 주었다. 하루 종일 마을은 음울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상주와 이장은 갑돌이와 수돌이 등 마을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근동에 부고를 알렸고 아낙들은 장례에 소용될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최대호가 오랫동안 베푼 인심덕인지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근동의 사람들 까지 상가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멍석을 깔고 오색 깃발에 만사(輓詞)를 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만사를 짓는 사람들은 최대호와 오랜 친분이 있는 근동의 유지들이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의 교양을 갖춘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언문 또는 한자로 벗의 딸이 혼인도 못한 상태에서 복중 아기를 담고 애통하게 사망한 감회를 적어 내려갔다. 한시 또는 사설로 쓰인 만가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대부분의 내용은 망자가 임을 기다리는 애절한 5언 또는 7언 절구(絶句)의 한시 또는 언문(諺文)이었다.

꿈결에 매화 향기 아련하게 풍기고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니 머리카락 차가워라

초저녁 문 닫는 것을 잊고 깜빡 잠들었더니

달은 이미 서산마루에 걸렸고 침상 가운데 달빛만 쌓였네

南風融小雪 喜雨白顔晴 明日聞花信 愁心衰淡星

따뜻한 바람 잔설을 녹이고

반가운 비는 미인의 얼굴을 맑게 하네

내일 꽃 소식 들려오면

겨우내 우울했던 마음도 희미한 별빛처럼 사라지겠지

그대는 소슬한 달밤 누구를 생각하시나요

수심 깊고 잠자리 쓸쓸한데 밤은 길기도 해요

처음 뵈었을 때를 그려봅니다

새로운 인연이 어떤지요

晩夕寒雲霑綠岳 春風向汝鎔肝腸 願弗易心餘作霓 今宵不閉明燈房

늦은 저녁 차가운 비구름 산을 적시고

그대 향한 정열 애간장을 녹이네

원컨대 아직 무지개 띄울 여유 있으니 마음 변치 마소서

이 밤도 불을 밝히고 문 열어 놓겠습니다

새날이 밝았다. 마을 장정들이 방에 들어가 관을 내오려고 하였으나, 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정들 열 명이 달라붙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허어. 이상스러운 일이로다. 관이 움직이지 않다니."

동네 원로들은 괴이한 일이라며 혀를 찼다. 청년들이 관 밑에 지렛대를 넣고 관을 들어 올리려고 하였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괴이한 일일세.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마당에 서있는 청년들! 모두 방으로 들어와 다시 한 번 들어보자고.”

이장이 청년들은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관은 천근 바위처럼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원로들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두려워하였다.

“금봉이가 한(恨)이 얼마나 깊었으면 관이 꿈쩍도 안 할까? 어이구.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마지막 가는 길마저 순탄치 못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가까이서 지켜보던 동네 아낙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안타까워했다. 원로들은 삼삼오오 모여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개똥어멈, 우리는 저 멀리 갑시다. 혹시 우리들이 전에 험담한 것을 알고 그 애 혼령이 우리에게 달라붙을까 무서워.”

몇몇 아낙들은 기괴한 일을 두려워하면서 혹시나 한을 품은 망자의 혼령이 자신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스무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었지만 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든 사람들은 황진이의 고사(古事)를 떠올렸다.

조선 최고의 명기(名妓)로 소문난 송도의 황진이(黃眞伊)가 기생에 적을 두기 전에 그녀를 사모했던 이웃 총각이 죽었다. 그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다. 수십 명의 청년들이 매달려 상여를 움직여 보려고 하였으나 상여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황진이를 짝사랑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속치마를 달라고 하였다. 양반 가문의 딸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손수 집 밖으로 나와 자신의 속치마를 상여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상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황진이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포기하고 기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금봉 어머니, 박도령이 덮고 자던 이불을 관에 올려놓아 보세요.”

황진이의 일화를 알고 있던 이장이 이상한 주문을 하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봉양댁도 어린 시절에 황진이 이야기를 들어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사랑채에 들어 박달이 덮고 잤던 이불 한 채를 들고 나왔다. 봉양댁은 박달이 덮고 잤던 이불을 관 위에 올려놓고 통곡하였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딸의 관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금봉아, 네 마음 다 안다. 박도령이 오거든 내 절대 미워하거나, 해코지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그리고 이제 그만 떠나야지. 이 어미를 믿고 어서 떠나거라.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어서 서둘러 떠나야 해. 갈 길이 먼데 여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니. 네가 시집갈 때 쓰려고 장만한 혼사품과 편지를 박도령 오면 줄 거야. 이제 이승의 모든 인연들을 훌훌 털어 버리거라. 네 소원대로 너를 이등령 꼭대기 양지바른 곳에 네 유택을 마련하였다. 이제 떠나야지. 북망산을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금봉아, 이제는 이승의 못 다한 미련을 버리거라.”

봉양댁이 눈물로 딸의 관을 잡고 하소연하고 나자, 이번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관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금봉아, 금봉아,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박도령이 오거든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 이 아비를 믿고 어서 떠나거라. 갈 길이 먼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어서, 가야지.”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의 관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였다.

“금봉아, 금봉아, 이리 허망하게 가면 나는 어쩌라고.”

이번에는 갑돌이 금봉이 관을 잡고 눈물을 뿌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훌쩍거렸다. 마을 원로들과 아낙들도 남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장례가 지연되고 있었다.

“금봉아, 어서 떠나야지. 이리 한없이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하니, 엄마가 꼭 네 유언을 들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금봉아, 이 어미 말을 들어야지.”

그녀가 딸의 관을 쓰다듬으며 울먹이고 있을 때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방으로 날아들었다. 나비는 방으로 날아들어 최대호와 봉양댁 그리고 갑돌이 머리 위에 차례로 앉더니 방에서 나가 창공으로 사라졌다.

“오오, 금봉이 혼령이 나비로 화하여 하직인사를 하려고 왔구나.”

“옛날이야기에서 사람이 원통하게 죽으면 그 혼령이 나비가 되어 현신한다고 들었는데, 그 전설이 사실이었구나.”

“금봉이가 얼마나 사랑의 병이 깊었으면 집을 떠나지 못하고 나비가 되어 나타났을꼬? 아이고, 불쌍해라.”

마을 사람들은 나비가 나타나자 한마디씩 하면서 금봉이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마을 원로들은 나비를 보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장례를 마치는 즉시 서낭당에 제사를 올리자고 하였다. 나비 소동이 있고난 뒤 마을 장정들이 방으로 들어와 관을 들자 가뿐하게 들렸다.

어허야, 저승길이 멀다더니

닥쳐보니 대문 밖이 그곳일세

부귀영화 다 버리고 홀로 떠나는 내 심정

에구에구, 원통절통해라

가기 싫은 저승길에 발길이 땅에 붙었구나…….

요령을 흔들며 부르는 선소리꾼의 슬프고도 구성진 만가(輓歌)가 벌말에 울려 퍼지며, 상여는 천천히 마을 빠져 나가 이등령으로 향했다. 금봉의 부모와 일가친인척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다양한 내용이 쓰인 만장기(挽章旗)를 들고 상여 뒤를 따랐다.

금봉이 이틀이 멀다하고 오르내리던 이등령 중턱 양지 바른 곳에 그녀의 유택이 마련되어 있었다. 해가 중천에 자리했을 때 상여가 이등령 정상에 도착하였다. 높은 산악 지대는 3월임에도 땅이 해빙되지 않은 탓에 묘혈(墓穴)을 깊이 팔 수 없었다. 어른 허리 정도 깊이로 파진 광혈(壙穴)에 관이 안치될 때 최대호와 봉양댁은 피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였다.

“금봉아-, 금봉아-, 이 어미를 두고 가면 어쩌란 말이냐. 아비와 어미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네가 먼저 가면 우리는 어찌 살란 말이냐.”

봉양댁은 친척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목 놓아 울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지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쳐야 했다.

“아가야-, 금봉아!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구나. 혈육이라고는 너 하나인데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간다 말이냐.”

최대호는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지 광중(壙中)에 안치된 딸의 관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금봉이의 고모와 이모 그리고 가까운 친인척들도 관을 내려다보며 오열하였다. 갑돌이도 꿇어 앉아 통곡하였다. 일꾼들이 삽으로 흙을 떠 넣자 봉양댁은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시랑산 이등령은 통곡하는 소리로 메아리 쳤다. 아담한 무덤이 조성되었지만, 초봄이라 잔디가 없어 솔가지를 꺾어 대충 덮어 놓았다. 봉분이 완성될 즈음 서쪽 하늘에 검은 구름이 시랑산과 구학산을 향해 몰려 왔다. 이어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달래 필 시기인데 눈이 내리다니. 이상한 날씨네그려.”

“날씨가 따뜻했다면 비가 내렸을 것이네. 하늘도 슬퍼하는 게지.”

장례를 치르고 나자 춘삼월인데도 불구하고 시랑산과 구학산 일대에 전례 없던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벌말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눈이 금봉이의 원혼이 뿌리는 눈물이라고 웅성거리기도 하고, 산신령님이 노하여 내리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막 피어난 던 봄꽃봉오리들이 모두 얼었고 시랑산은 겨울로 되돌아간 듯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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