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다시 찾은 평동 벌말

딸을 차가운 땅속에 장사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최대호는 술로 쓰라린 속을 달래며 흐느꼈다. 봉양댁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딸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금봉이의 고모와 이모들은 봉양댁이 행여 외동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 걱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가야, 미안하구나. 이 아비를 원망해다오. 아비도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구나. 괜찮은 사위를 얻어 외손봉사(外孫奉祀)을 받으려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오빠, 어쩌겠어요. 그 애 팔자가 거기뿐인 것을요.”

금봉이의 고모가 최대호의 잔에 술을 따르며 위로하였다.

“그때, 그때 그 사람을 들이지 말든지 아니면 하룻밤만 자고가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어. 하필이면 헌헌장부, 선풍도골의 유생이 우리 집에 들었더란 말이냐. 그 사람과 우리 금봉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기에 그때 찾아왔단 말인가.”

“언니, 이제 다 지나간 일이유. 그것이 금봉이 운명이었던 거유. 이제 지난 일은 잊어야지 어쩔 거유.”

금봉이의 이모가 언니를 달랬다. 봉양댁은 박달이 집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잘난 사내는 풍파(風波)를 몰고 다닌다는 것을 부모나 어른들에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남편이 박달을 마치 사윗감처럼 대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딸이 세상을 버린 것은 자신의 불찰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심하게 자책하였다. 갑돌이와 수돌이는 또래들과 과수댁을 찾아 울적한 마음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 수돌이는 덤덤한 반면 갑돌이는 계속 흐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갑돌아, 이제 그만 울어. 네가 운다고 금봉이가 살아오겠니? 이제 그만 울고 술이나 마시자.”

“수돌아, 너도, 너도 금봉이를 좋아했지? 난, 금봉이를 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어. 그런데, 그녀가 어느 날 근본도 모르는 사내에게 정을 덜컥 주고 나서 저리 된 것은 너와 나의 책임이 커. 너나 나나 금봉이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 갔다면 그 애가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가지 않았을 거야. 아마, 너와 내가 연적(戀敵)이 되었을망정 우리가 적극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금봉이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차라리 너와 나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금봉이의 마음을 완전하게 훔쳤어야 하는 건데, 우리가 바보짓을 했어.”

갑돌이 대취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였다.

“수돌아,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나 죽고 싶다. 앞으로 허전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간단 말이니?”

갑돌이 다시 흐느꼈다.

“갑돌아, 네 마음 이해하지만 이제 마음 다잡고 다시 시작해야해. 세상에 여자가 어디 금봉이 뿐이니.”

“아냐, 아냐! 내 가슴에는 오로지 금봉이만 존재하고 있어. 금봉이 밖에 없다고.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이 돌아가고 두 사내는 밤늦도록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지 못한 불찰을 탓하며 술잔을 들었다.

“이제 그만 드시고 집에 가세유. 가게 문을 닫아야 해유.”

과수댁이 입을 삐쭉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미 새벽에 접어들어 마을은 깊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벌말은 예전처럼 겉으로는 고요했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며, 그렇게 쓸쓸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편 불길한 꿈에 놀라 부리나케 달려오던 박달은 갑자기 내린 눈으로 남으로 향하는 길이 고역이었다. 다행히 경기도 여주(驪州) 가남 쯤에서 인심 좋은 사람 덕분에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음성에서 또 다시 운이 좋아 남녘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우마차를 얻어 타는 행운이 주어졌다. 그는 닷새 만에 충주까지 갈 수 있었다. 충주쯤 내려오자 들판이고 야트막한 산이고 할 것 없이 눈이 어른 무릎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그는 날이 저물자 충주 산척(山尺)의 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박달은 주막을 나섰다.

“도령, 눈이 산이며 들판 할 것 없이 태산같이 쌓였는데 길을 떠나려고유? 제천 쪽으로 가려면 시랑산 이등령을 넘어야 할 텐데, 거기도 눈이 엄청 내렸을 거유. 우리 주막에서 며칠 더 묵으면서 눈이 어느 정도 녹았을 때 떠나유. 지금 가다가 눈구덩이에라도 빠지면 큰일난다구유. 그런 옷차림으로 가다가 동사해유.”

마음이 급한 박달의 귀에 주모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죽기야 하겠습니까?”

“모르는 소리 마유. 지난해 이맘때에도 눈 쌓인 이등령을 넘다 두 사람이나 길을 잃어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어유. 며칠 더 있다 가유.”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주모, 다음에 다시 봅시다.”

“조심해유. 잘생긴 도령님. 언제 와도 환영이유.”

박달은 죽을 각오로 주막을 떠났다. 산길, 들판 길을 오르내리다 굴러 넘어져 다리와 팔에 타박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금봉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뚝이처럼 일어나 잠시도 쉬지 않고 눈길을 걸었다. 저 멀리 시랑산과 구학산이 희미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박달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이등령을 향해 달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등령 정상은 뽀얗게 눈보라가 일어 마치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달은 걸으면서 며칠 전에 금봉이 현몽(現夢)하여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등령에서 기다린다고 했지? 하필이면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고개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을까?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금봉이가 이등령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빨리 올라가야지.’

박달이 힘들게 이등령 정상에 도착하였을 때 못 보던 무덤 하나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잔디를 입히지 못해 붉은 황토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사지낸 지 며칠 되지 않은 무덤 같았다.

‘이상하다. 전에 못 보던 무덤인데?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고갯마루에 무덤을 쓰다니? 이상한걸? 그런데 금봉이는 어디 있는 거야?’

박달은 잠시 그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금봉이를 찾았다.

“금봉이-. 금봉이! 어디 있어? 나 박달이야. 어디 있어?”

휘잉 -.

박달이 아무리 금봉이를 불러보았지만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금봉이, 나야. 박달이라고. 어디 있는 거야? 대답 좀 해봐.”

‘금봉이가 나를 기다리다 지쳐서 내려간 모양이야. 빨리 벌말로 가야지.

금봉이 이름을 부르다 지친 박달은 멀리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봉이가 그리도 애타게 올려다보던 북녘 하늘이었다. 북녘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만 떠 있을 뿐이었다. 석고상처럼 서서 한참 동안 먼 하늘만 바라보던 박달이 금봉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등령을 내려왔다. 해가 서산으로 막 넘어갈 때 박달은 서낭당에 도착하였다.

“성황신님, 송구하옵니다.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금봉이는 잘 있겠지요? 진즉에 찾아 와야 했는데 과거에 낙방하는 바람에 차마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 용렬한 놈을 꾸짖어 주세요.”

박달은 서낭신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 서둘러 벌말로 향하였다. 벌말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멀리 한두 집에서 불빛이 비칠 뿐 고요하다 못해 사람이 사는 마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벌말을 떠난 지 반년 만에 도착한 박달은 감회가 깊었다. 비록 눈에 덮여 있는 산촌이지만 반년 전 금봉이와 사랑을 나누던 마을이어서 그런지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달은 금의야행한 자신을 보고 금봉이 얼마나 놀라워할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금봉이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박달이 동네에 들어서자 마을 초입에서 개 한 마리가 박달을 보며 짖어대기 시작하자 금방 동네 모든 개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짖어댔다. 그런데 예전에 듣던 개들의 경쾌한 울음소리가 아니라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계세요? 계십니까?"

최대호는 딸을 이등령 정산에 장사지내고 혼자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홀로 사랑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얼핏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방문을 닫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또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최대호는 밖으로 나와 대문으로 걸어갔다. 대문은 빗장이 질러진 상태였다. 집에 누가 들어올 사람이 없으니 일찍 빗장을 질러놓은 것이었다.

"거 누구요? 누가 왔소?"

"어르신! 박달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뭐? 바, 박달!”

최대호가 박달이란 소리에 어른 대문을 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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