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이등령 애가(哀歌)

“어르신! 저 박달입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대문을 열자 박달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최대호에게 절을 하였다.

“자, 자네! 박도령?”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박달의 모습은 너무 초췌하고 여위어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반년 전에 닷새 동안 머물던 박달이 분명했다. 박달이 덜덜 떨고 있었다.

‘누구라고? 박달이라고?’

봉양댁도 남편이 밖으로 나가자 대문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도 밖에서 ‘박달’이라는 소리를 얼핏 듣고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여보! 금봉 엄마, 박도령이 왔소.”

“뭐라고요! 박도령?”

봉양댁은 남편의 목소리에 현기증을 느끼면서 휘청거렸다.

“자, 자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르신, 죄송합니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최대호는 반가움보다 분노가 일었다. 순간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곧 박달을 내릴 칠 태세였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멀뚱히 박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다스리느라 부들부들 떨며 심호흡을 조절하였다.

“어르신, 금봉이는 잘 있는지요?”

“…….”

“어머님께서도 안녕하신지요?”

“…….”

"어르신!”

박달은 최대호가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최대호의 분노에 찬 모습에 정신이 아득했다.

“자네!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 왔는가?”

“죄, 죄송합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차마 찾아뵐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송구합니다. 한양에 머물며 곧 있을 별시(別試)를 준비하느라 기별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 별시에 합격하고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그제야 지나간 상황을 대강 짐작한 최대호는 침통한 표정으로 박달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자네! 저기 좀 보시게.”

“…….”

“저기, 저 대청마루에 설치된 궤연(几筵)이 보이지 않는가?”

“궤, 궤연이라고요? 누구의 궤연입니까?”

박달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상청의 궤연을 발견하였다. 궤연 위에 위패도 세워져 있었다.

“어르신? 집안에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습니까?”

그때까지도 박달은 그 위패의 주인이 금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최대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박달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금봉이 삼우제(三虞祭) 날이네.”

“네에! 그, 금봉이 삼우제 날이라고요?”

박달은 최대호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르신, 제가 좀 늦게 찾아뵈었다고 놀리시는 거지요?”

그때 봉양댁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박달, 이노옴! 삼 개월 후면 돌아온다고 약속해 놓고 왜 이제 나타난 거야? 내 딸 살려내. 금봉이 살려내 이놈아! 네놈 때문에 생떼 같은 내 딸이 죽었어. 어서 살려내란 말이야.”

봉양댁이 박달에게 달려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울부짖었다. 그때야 사실을 직감한 박달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정신이 아득했다.

‘아! 며칠 전 꿈속에 금봉이가 소복을 입고 나타나더니…….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나에게 하직 인사를 하려고 현몽(現夢)하였구나.’

박달은 그제야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마당에 풀썩 주저앉더니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놈을 죽여주세요. 지난가을에 본 과거에 낙방하여 차마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한양에서 올봄에 치러질 별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별시에 꼭 합격한 뒤에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꼭 합격하여 당당하게 금봉이 앞에 나타나고 싶었습니다.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박달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자 부부는 박달의 지난 사정을 알고 더는 닦달하지 않았다. 박달이 어찌나 서럽게 통곡하는지 최대호는 당황하였다.

“이 사람아!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더라도 우리 금봉이가 기다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 편지 한 통 없었나? 편지 한 통이라도 인편에 보냈더라면 그 애가 이승을 떠나지 않았을 거 아닌가? 편지 한 통 쓰기가 그렇게 어려웠단 말인가?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사람이 죽었는데 이제 와서 뭘 어찌한단 말인가 그래. 박달이 이놈! 어서 내 딸 살려내. 생떼 같은 내 딸을 네놈이 죽였어. 내 딸 살려내. 어서…….”

봉양댁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통곡하였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금봉이가 이리 허무하게 갈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같은 놈은 죽어야 합니다.”

박달은 주먹으로 땅을 치고 이마를 짓찧으면서 대성통곡하였다. 주먹과 이마에서 선혈이 배어 나왔다. 그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채 통곡하였다.

“이 사람아! 일어나시게. 금봉이 궤연 앞에서 향을 사르고 인사하시게. 금봉이가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가? 그 애가 죽으면 이등령에 묻어달라고 하여 이등령 정상 양지바른 곳에 그 애의 유택을 마련해 줬네.”

‘아! 그렇다면 아까 이등령 정상에 새로 생겨난 그 무덤이, 그 무덤의 주인이 금봉이었더란 말인가?’

박달은 낮에 이등령 정상에서 본 쓸쓸한 무덤 하나를 생각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박달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상청에 올라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였다.

“금봉아, 금봉아!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 이리 허무하게 가다니. 이등령 꼭대기에 있는 너를 보고도 그냥 내려왔구나.”

박달은 상청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신의 무능과 불찰을 탓했다. 박달이 우는 모습이 어찌나 애절하던지 박달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달려온 갑돌이와 수돌이도 어쩌지 못했다. 그들은 늦게라도 박달이 벌말에 찾아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금봉아! 이리 허무하게 가다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어찌 혼자 북망산으로 떠나갔더라 말이냐. 나는 어찌하라고…….”

박달은 상청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바닥이 꺼져라 통곡하였다. 박달의 울음소리는 담장을 넘어 이웃들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 사품에 이웃 사람들이 최대호 집 마당에 모여들었다.

“저놈이 사람을 죽여 놓고 무슨 낯짝으로 찾아온 거야? 저놈을 밧줄로 꽁꽁 묶어 서낭당 느티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들겨 패서 억울하게 죽은 금봉이 원혼을 달래야 해.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아냐, 제 발로 찾아와 저리 슬피 우는 것을 보면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찾아온 것을 보니 심성이 나쁜 작자는 아닌 것 같구먼.”

“진작 찾아올 것이지. 금봉이가 한을 품고 죽은 뒤에 찾아와 저리 운다고 그 애가 살아 돌아오겠어? 보름만 빨리 왔더라도 금봉이가 이승을 뜨지 않았을 텐데…….”

이웃 사람들은 박달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저마다 불편한 심사를 한마디씩 내뱉었다.

“박도령! 금봉이가 자네에게 전해달라고 한 편지일세.”

마음을 추스른 최대호가 편지를 박달에게 전해주었다. 박달은 잠시 울음을 그치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서방님, 보시어요.

서방님께서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즈음 저는 이승에 없을 겁니다. 반년을 하루같이 저는 오로지 서방님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빌었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방님의 급제를 위하여 매일 같이 천지신명님에게 빌고 빌었답니다. 서방님과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낸 이등령에 올라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방님의 무사 귀환을 빌었습니다. 서방님, 보고 싶어요. 이제 저는 서방님을 기다리다 지쳐 병이 들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서방님을 뵙고 싶었어요. 만약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서러워하지 마세요.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잖아요. 이승에서 서방님과 못다 한 사랑을 저승에 가면 먼 훗날 반드시 이루고 말 거에요. 서방님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이만 서방님께 하직 인사 올립니다. 항상 강건하시고 꼭 과거에 급제하시어 소원성취하세요. 혹시 고향 가시는 길에 한 번만이라도 제 무덤을 찾아주신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서방님,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 최금봉 올림 -

“금봉아, 금봉아! 못난 놈을 용서해다오. 나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다니. 내 죄를 어찌하라고. 내 죄를…….:

언문으로 쓰인 편지를 읽고 난 박달은 집이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였다. 금봉이 부모는 서럽게 우는 박달이 불쌍하여 그만 울라고 말렸다. 하지만 박달은 상청에서 밤새 울고 동이 트자마자 이등령으로 향했다.

“금봉아, 금봉아! 기다려다오. 내가 간다. 이 추운 날 너를 차가운 땅속에 혼자 잠들게 할 수는 없어. 기다려다오. 내가 간다.”

“이 사람아! 어딜 가는가?”

최대호가 박달의 뒤를 쫓았다. 그가 아무리 소리쳐도 박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등령으로 달려갔다. 최대호와 갑돌이가 박달의 뒤를 쫓았다. 박달이 금봉이 무덤 앞에 도착하자 엎드려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어찌나 큰소리로 서럽게 울던지 시랑산 계곡에 박달의 통곡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등령을 넘어가던 산새들도 박달의 통곡 소리에 그만 하늘을 빙빙 돌며 날아가지 못하고 구름도 시랑산 옆으로 비껴 흘러갔다. 박달이 한참 울더니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그, 금봉아! 나야. 나 박달이야.”

“서방님, 왜 이제 오셨어요.”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해. 과거에 낙방해서 네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단다. 올봄에 예정된 별시에 합격하여 네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었단다. 하지만 네가 세상에 없으니 모든 게 무의미하게 되었구나.”

박달이 허공에 환영으로 나타난 금봉이와 마주했다.

“서방님을 다시 만났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셔서 다음 별시에 꼭 장원급제하세요. 제가 서방님께서 장원급제하도록 돕겠어요.”

그런데 금봉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꼭 안고 박달을 보며 웃고 있었다.

“서방님, 보시어요.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랍니다.”

금봉이는 갓난아이를 박달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금봉이의 환영(幻影)은 박달이 오래전에 꿈속에서 만났던 선녀였고, 강보에 싸인 아기는 박달을 선녀에게 안내했던 그 선동(仙童)의 모습이었다.

“금봉아! 고마워. 좀 더 기다리지 않고 뭐가 급해 혼자 간 거야? 아기를 안아 보고 싶구나. 아기가 우리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것 같구나.”

“그렇죠? 서방님과 저를 닮았어요.”

“맞다. 아기를 이리 줘봐. 우리 아기를 안아 보고 싶구나.”

박달이 금봉이와 아기의 환영을 보고 있었다. 박달이 아기를 안아 보려고 무덤 아래 벼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봉이 유택 뒤로는 수십 장(丈) 높이의 낭떠러지로 무척 위험했다.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위험해요. 어서 뒤로 올라가셔요.”

금봉이의 절규에 가까운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달은 낭떠러지 쪽으로 걸어갔다.

“금봉아! 미안하구나. 내가 너에게 천추의 한을 남겼구나.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어. 어찌하면 좋겠니? 내가 너를 위하여 어찌하면 좋겠니? 나 같은 놈은 더는 세상 살 가치가 없다. 나도 네 뒤를 따라갈 거야. 저승에서 너하고 우리 아기를 키우며 오순도순 살고 싶구나.”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어서 올라가세요. 어서요.”

금봉이가 아무리 말려도 박달은 계속해서 낭떠러지 쪽으로 걸어갔다. 박달의 행동을 지켜보던 최대호와 갑돌이가 위험을 감지하고 박달에게 달려왔다.

“박도령! 거기서. 위험해. 거기 서란 말이야.”

“박달 도령, 위험해요. 거기서요.”

최대호와 갑돌이가 박달에게 거의 달려왔을 때 박달이 발을 헛디디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달이 하얀 도포 자락을 펄럭거리며 한 송이 꽃이 되어 떨어졌다.

“서방님!”

“박달이!”

“박도령!”

휘이이잉-.

이등령 중턱에 찬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남녀의 애끓는 통곡 소리가 한나절 메아리쳤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 사계절이 제대로 운행되고 천지의 온갖 만물들이 다 생겨나지만,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하늘은 늘 말이 없다. 하늘이 인간에게 사계절을 운행하겠다거나, 만물이 생육되도록 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거나, 그 누구에게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사계절을 운행시키고 천지의 만물을 스스로 낳고 기르도록 해주고 있다. 하늘은 인간이 모르게 행위로써 말을 대신하고 있다. 하늘이 하는 행위가 곧 만인의 뜻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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