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폭풍전야

양광이란 허릅숭이 황제가 또 광증이 발작하여 수나라 젊은이 113만 명을 강제로 끌어모아 전쟁터로 내몰았다. 병참지원과 잡역 등에 동원된 잡부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3백만 명에 가까웠다.

양광의 아비는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이었다. 그는 14년 전 고구려 *고대원(高大元) 태왕이 수나라에 입조하여 자신에게 하례를 올리지 않는다는 빌미로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범했다. 수나라 군대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 당시 주라후가 이끄는 수나라 해군은 황해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상당수 병력을 잃었고, 잔여 병력도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이다 대패했다. 육로를 이용해 고구려로 진군한 수나라 장수 양량(楊諒)의 군대는 어렵게 요하(遼河)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장마와 전염병 그리고 식량부족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수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고구려 태왕은 사신을 보내 양견에게 유감의 뜻을 전하고 화해를 구하면서 1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양견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 양광이 황제에 등극하자 또다시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다. 양광은 아버지의 추종 세력들이 많은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거란을 공격하였고,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 고대원 - 고구려 제26대 영양 태왕, 재위 590년부터 ~ 618년까지.

다른 나라들은 모두 수나라에 조공하는데 고구려만 조공하지 않았다. 양광은 잠재해 있는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피곤하게 했으며, 동시에 고구려를 정복할 계획을 구체화 시키고 있었다. 그가 돌궐에 갔을 때 마침 고구려에서 파견 나온 사신을 만나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고구려 태왕은 조속히 수나라에 입조하라. 그리하면 짐이 고구려 태왕을 돌궐 왕처럼 대우할 것이다.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짐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가 정벌할 것이나.’

사신의 보고를 받은 고구려 태왕은 노발대발하며 양광의 요구를 무시해버렸다. 고구려 태왕은 수나라의 침입을 예상하여 서둘러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태왕은 전국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장정들을 소집하였고, 조정은 전시체제로 전환되어 태왕의 요구에 호응하였다.

양광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평년보다 두 배 이상의 세금을 거둬들이고 장정들을 강제 징집했으며, 아버지 양견처럼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수나라 백성들은 죽을 맛이었다. 노인과 아녀자들만 집에 있었고 사내들은 전쟁 준비에 동원되었다. 전투에 투입될 배를 건조하는 수나라 백성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배 안에서 먹고 자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고구려 태왕은 평원왕(平原王)의 아들로 8척 장신에 온화한 풍모를 지닌 호걸이었다. 그는 이전의 태왕들과 달리 다른 나라가 도전해오면 즉시 반격을 가하고 철저하게 복수하는 등 국토 수호에도 적극적인 태왕이었다. 요동 지역에는 요동성, 비사성, 박작성, 개모성, 현도성, 안시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주요 군사 기지가 밀접해 있었다.

고구려는 태왕이 직접 전선을 돌아보며 전쟁 준비 상태를 점검하였다. 동시에 거란과 말갈족 등과 더불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수나라에서 건너온 망명자를 받아들이며 내부 결속에도 진력하였다.

양견의 제1차 침입이 있고 14년이 지났다. 고구려 태왕이 등극한 지 22년째 된 해 정월이었다. 양광은 300만에 가까운 수나라 군사와 인부, 마부, 짐꾼 등을 *탁군(涿郡)에 집결시켰다. 고구려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수나라 전국에서 징집된 장정들이 탁군까지 가는데 반년이 넘게 걸렸다. 양광은 낙양에서 탁군으로 달려가 고구려 정벌군을 직접 점검하고 출전시켰다.

좌익군(左翼軍)은 해명, 개마, 요동, 부여, 옥저 방향으로 진출하고, 우익군(右翼軍)은 임둔, 숙신, 갈석, 대방 방향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수나라를 이끄는 장수들은 양광이 직접 선발한 자들로 그의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간신배들이었다.

수나라 육군은 좌익위대장군에 우문술(宇文述), 우익위대장군에 우중문(于仲文), 좌효위대장군에 형원항(荊元恒), 우효위대장군에 설세웅(薛世雄), 우둔위장군에 신세웅(辛世雄), 좌둔위대장군에 맥철장(麥鐵杖), 우어위장군에 장근(張瑾), 우무후장군에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좌무위장군에 최홍승(崔弘昇), 우어위호분랑장에 위문승(衛文昇) 등이 나누어 통솔하고 수군(水軍)은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통솔하였다.

고구려 육군을 총지휘하는 장수는 을지문덕이었고, 해군(海軍)은 태왕의 아우 고건무(高建武)가 이끌었다. 을지문덕은 평양 인근에 있는 석다산(石多山) 기슭에서 태어났으며, 성정이 침착하고 지략과 문장력도 갖춘 덕장(德將)인 동시에 지장(智將)이었다. 그는 청년이 되어 산에 들어가 심신을 수양하고 무예를 익히며 호연지기를 가슴에 품었다.

을지문덕은 국선도를 신봉하는 애국자로 심신의 수련을 마치고 바로 조의선인(皂衣仙人)이 되었다. 조의선인은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의 전통을 이은 단체였다. 조의선인이 되면 6예를 배웠는데, 이는 예법, 음악, 활쏘기, 마술, 서예, 산학(算學)에 해당하는 과목이었다.

조의선인은 단체원들의 일체감과 동질성을 위해 검은 옷을 입었다. 고구려의 관등에도 조의라는 관등(官等)이 있었다. 조의는 평소에 모시옷에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두르고 생활하는데, 주로 도로와 하천 정비, 성곽 수축 같은 일에 종사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은 주저 없이 전선으로 달려갔다. 
* 탁군 – 지금의 북경 인근 지역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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