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녹족부인의 자식들

다섯 살밖에 안 된 웅록의 자식들을 잡아간 해적들은 아이들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릴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험상궂게 생긴 수나라 해적들에 의해 배의 창고에 갇혀 지내야 했다.

해적들이 주로 납치하는 대상은 젊은 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이었는데, 스물 안팎의 처녀는 보통 백양에 거래되었고, 어린아이들은 남,녀의 구분과 건강 상태에 따라 보통 오십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배에 갇혀 낯선 사람, 이상 기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으로 아이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 자주 배탈이 나고 설사를 했다. 결국, 아홉 명의 형제 중 이록, 사록, 오록, 칠록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그만 배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남은 다섯 형제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였고 수나라의 가장 큰 도시인 장안(長安)까지 가게 되었다.

장안은 양견이 수나라를 건국할 때 도읍지였다. 장안에는 수나라가 인근 소국들을 정벌하거나 침범하는 과정에서 잡혀 온 포로들을 사고파는 인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인간 시장에서 거래되는 포로는 노예가 되어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갔다. 인간 시장에는 말갈, 거란, 토번(吐藩), 인도, 안남, 왜국 그리고 멀리 페르시아, 로마 등지에서 온 상인들로 넘쳐났다.

다섯 형제도 인간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다섯 형제 중 육록과 팔록이 페르시아 노예상에게 팔리고, 일록과 삼록 그리고 막내인 구록(九鹿)이 다행히 수나라의 한 장자(長者)에게 팔렸다. 그런데 세 형제를 산 장자는 번회(樊回)라는 자로 수나라 도읍지인 낙양에서 제법 큰소리치는 거부(巨富)였다. 번회는 사람을 알아보는 신통력이 있어 삼 형제의 발을 보고 그들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번회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과 일록 삼 형제는 같은 또래였다. 번회는 삼 형제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켜보았다. 아이들이 수나라 말을 몰라 처음에는 어눌하고 굼뜬 행동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수나라 말도 능숙하게 하고 신체도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번회는 삼 형제가 제각각의 이름이 있었지만 통상 '녹족(鹿足) 삼 형제'라 불렀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삼 형제는 십 세 중반이 되면서 키가 거의 어른 정도로 자랐고, 행동 또한 번개처럼 빨랐다.

그에 비해 번회의 아들은 녹족 삼 형제의 기량에 크게 못 미쳤다. 번회는 당초 노예로 사 온 녹족 삼 형제를 자기 아들로 입적시키고 공부를 가르쳤다. 그는 녹족 삼 형제의 발전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들을 장차 장수로 키우고 싶어 했다.

번회는 녹족 삼 형제를 낙양에서 유명한 장승(莊承)이란 처사의 문하생으로 들여 그를 스승으로 두고 수련하도록 배려했다. 장승에게는 수나라에서 유명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 수백 명이 제자로 있었다. 장승은 녹족 삼 형제의 진가를 알아보고 특별히 애정을 쏟았다. 장승은 그들에게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각종 권법(拳法)과 검술, 창술, 병법, 둔갑술 등을 가르쳤다. 게다가 장승은 대처 불자였기 때문에 녹족 삼 형제에게 불법(佛法)을 수행하도록 했다. 삼 형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알고 열 개를 가르치면 천 개를 깨달았다.

번회는 녹족 삼 형제의 일취월장에 크게 기뻐했다. 이름도 번일록, 번삼록, 번구록이라고 자신의 성씨를 붙여 부르게 했다. 다섯 살 때 고향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수나라에 팔려 온 지 어언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번회는 입산수도를 마친 녹족 삼 형제를 수나라 병부상서에게 소개하였다.

수나라 조정에는 번회와 친하게 지내는 인사들이 많았다. 병부상서는 번 삼 형제의 뛰어난 기량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추천하여 세 형제를 모두 금군의 자우무위(左右武衛)에 배속시켰다. 녹족 삼 형제는 기량이 뛰어나다 보니 승차도 빨랐다. 금군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삼 형제는 동시에 낭장(郎將)이 되었다.

수나라 조정 및 군부(軍府)에서는 녹족 삼 형제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서로 끌어가려고 혈안이 되었을 정도였다. 삼 형제는 일단 병부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녹족 삼 형제는 곧 탁록이 포함된 지역을 관할하는 절도사 아래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도위(都尉)가 되었다. 그들이 도위로 현지에서 근무하고 일 년이 지난 뒤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제2차 여·수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이때 번일록은 우중문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장(左將)이 되었고, 번삼록과 구록은 우문술의 진영에서 좌우 공격대장에 임명되었다.

수나라 백성이 되다시피 한 삼 형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자신들을 낳아준 어머니 녹족부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말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녹족 삼 형제는 모두 수나라의 군문(軍門)에 소속된 몸이지만 모이면 남의 시선을 피해 고구려 말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어머니와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들만의 아픈 기억을 공유하며, 언젠가 반드시 고향을 찾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