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녹족부인 적진에 가다

“형님, 페르시아 상인에게 팔려간 육록 형님과 팔록 형님이 보고 싶어요. 요즘 들어서 부쩍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형제들이 그립습니다. 우리 아홉 형제는 수나라 해적에 의해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조국 고구려가 아닌 수나라입니다. 당장 장군 막사로 달려가 우중문과 우문술의 목을 베어 고구려로 탈출하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참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삼 형제는 두 장수의 목을 취해 고구려에 바쳐야 합니다.”

“쉿-, 지금은 침착해야 한다. 경거망동하다가는 우리 삼 형제는 살아남지 못한다. 당장은 절대로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복종해야 한다. 반드시 우리 형제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희망을 잃지 말고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려 보자.”

압록수의 강물이 거의 장마 이전의 수준에 가까웠다. 탕탕 굽이치던 물결이 잔잔해지면서 수나라와 고구려 진영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아침 일찍 웅록에게 우중문에게 보내는 서신을 건넸다. 날씨가 청명했다.

웅록은 무예에 능하고 몸이 날랜 병사 두 명과 함께 쪽배를 타고 압록수를 건넜다. 배가 압록수를 다 건널 때까지 을지문덕은 물끄러미 웅록 일행을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이 들려준 ‘녹족 삼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웅록을 괴롭혔다. 그녀는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버선 아홉 켤레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웅록이 언젠가 꿈속에서 아홉 아들을 만났는데 모두 맨발이었다. 그녀는 그 꿈을 어쩌면 머지않아 아들들을 만나게 될 예지몽(豫知夢)이라고 생각했다. 웅록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우중문의 진영으로 가면서 버선을 모두 가져갔다.

압록수를 건넌 웅록 일행은 30여 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에 일행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이 한 어촌 마을을 지날 때쯤 주인 없는 노새와 당나귀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웅록 일행은 얼른 당나귀 한 마리씩 잡아타고 서쪽으로 내달렸다. 맨 앞장선 웅록이 하얀 깃발을 들고 있었다.

행여나 길가 수풀 속에 매복하고 있을지 모를 수나라 군사들에게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려야 했다. 세 사람이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그러나 당나귀는 말처럼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시오리쯤 갔을 때였다. 한 떼의 군사들이 풀숲에서 뛰쳐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창칼을 든 병사가 열 명, 활을 메고 말을 탄 병사가 한 명이었다.

“*징쉐이. 니먼쉬세이?”

“징쉐이. 니먼쉬세이?”

그들은 수나라 군사들이었다. 수나라 말을 모르는 웅록 일행 중 한 명이 수나라 발음으로 ‘까오리쉬찬(高丽使臣)’을 연발하자, 그제야 수나라 병사들은 웅록이 들고 있는 흰색 깃발을 보고 고구려 진영에서 보낸 전령임을 알았다.

수나라 병사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말 탄 병사가 웅록 일행을 안내하여 서쪽으로 이십여 리를 더 달렸다. 드디어 웅록 일행은 수나라 별동대가 설치한 진영에 도착하였다. 진영 입구에는 20여 명의 수나라 병사들이 장창을 들고 경계로 서고 있는데 하나 같이 얼굴이 하얗게 떠 있어 마치 병자들 같았다. 웅록 일행은 수나라 진영의 외곽 상태를 세밀하게 살폈다.

병영은 목책(木柵)을 드문드문 둘러쳐서 사이 사이에 병사 한두 명이 경계를 보고 있는데 대개는 목책 곁에 붙어 서서 졸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다. 병영 입구를 담당하는 군관인 듯한 자가 웅록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여 댔다. 웅록은 품 안에서 을지문덕이 건넨 서신을 군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 신신 봉투를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징쉬이, 니먼쉬세이 – 정지, 너희들은 누구냐?(停止, 你们是谁?)

“통궈(通過)”

군영 통과 명령이 떨어지면서 완전무장한 다른 수나라 병사들이 웅록 일행에게 달라붙어 병영 안으로 안내하였다. 수나라 병영은 조용했다. 웅록 일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영을 두루 살폈다. 드물게 병사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거나 병장기를 수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전마(戰馬)의 등을 쇠갈퀴로 긁어대는 병사, 군복을 빨랫줄에 너는 병사. 무엇을 잘못했는지 상관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는 병사, 막사 밖에서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바지를 내리고 이를 잡는 병사, 막사 사이에서 발가벗은 상태로 물을 뿌려가며 몸을 닦는 병사, 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하는 병사 등 다양한 별동대 병영의 모습이 웅록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수나라 병사들의 몸이 거의 바싹 마른 상태였다. 홑겹의 여름옷을 입은 병사들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얼이 빠진 상태여서 발로 툭 차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웅록 일행이 일반 막사보다 서너 배는 커 보이는 막사 앞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한 사내가 밖으로 나오며 일행을 맞이했다.

막사는 창칼을 든 젊은 병사들이 이중으로 경계를 보고 있는데, 모두 피로에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서 나는지 모르지만, 귀에 익은 풍악 소리가 들렸다. 웅록이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고구려 음악이 분명했다. * 업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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