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는 둥둥

김승희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아르헨티나 아, 아르헨티나가 냄비 두드리던 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여름 밤거리를 뒤흔들던 소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냄비, 프라이팬, 국자, 냄비뚜껑까지
들고 나와 두드려대던 소리,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내지른 비명소리
아르헨티나 아아
빚과 실업자, 극빈자, 점쟁이와 정신과의사,
사망자와 부상자들, 그 한숨소리
나도 프라이팬을 들고 뛰어가 섞인 듯
입을 꽈 다문 채 몇 시간씩 은행과 직업소개소 앞에 늘어선 모습들
이런 광경 고요함

비 내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
묵묵히 밥을 먹는다
다리 하나 부러진 개다리밥상
아무도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냄비 밑바닥만 우두커니 들여다본다
냄비 안에 시래깃국, 푸르른 논과 논두렁들
쌀이 무엇인지 아니? 신의 이빨이란다,
인간이 배가 고파 헤맬 때 신이 이빨을 뽑아
빈 논에 던져 자란 것이란다,
경련하는 밥상, 엄마의 말이 그 경련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조용한 밥상의 시간,
비 내리는 저녁 장마,
냄비는 둥둥
 

흔한 것 같지만 시를 읽으면서 잊었던 기억의 그림이 떠오른다. 어린 시골의 풍경도 떠오르고 먼 나라와 가까운 이웃의 삶도 다시 기억한다. 비가 오면 시간이 많아진 어머니께서는 호박 숭숭 썰어 넣고 칼국수를 끓여 주셨다. 나는 비를 맞으며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께 칼국수를 배달했었다. 아르헨티나가 아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생각나는 비 오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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