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녹족 삼형제 자신의 정체를 알다

두 아우가 찾아오자 일록은 오랜만에 아우들과 술자리를 만들고 회포를 풀고 싶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녹족 삼 형제가 워낙 탁월하고 전투에 임하면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자 행여 자신의 휘하에서 다른 장군의 밑으로 갈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우중문은 삼록 형제만큼 전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부장이나 공격대장이 없었고, 병법을 아는 지휘관도 없었다.

우문술 역시 일록 좌장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장군의 밑으로 이동할까 걱정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일록의 세 끼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챙기는 등 부장을 황제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으며 그를 자신의 휘하에 붙잡아두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형님, 그간 무탈하셨죠?”

“암, 나야 잘 있지. 그런데, 아우들이 예고도 없이 방문하니 기분이 좋네. 자, 우리 형제들의 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한 잔씩 들자.”

일록은 우문술 장군 다음으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우문술은 일록의 양부인 번회와 막역한 사이였다. 우문술의 아버지는 수나라 건국 이전에 북제(北周)의 3대 황제 우문옹의 총애를 받던 장군이었다. 우문성과 번회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우문술은 번회의 큰아들 일록은 마치 친아들처럼 생각하며, 그의 군권(軍權)의 상당 부분을 좌장인 일록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그는 우문술의 큰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우문화급은 수나라 황제 양광의 근위대장으로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삼 형제가 술이 불콰해지자 삼록이 주변의 시자(侍者)들을 모두 물렸다. 구록이 밖을 한번 살피고 나서 일록에게 말했다.

“형님, 오늘 낮에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뭐라고? 어, 어머님을 만났다고? 그게 정말이냐? 너희들이 지금 술 한잔 마시고 취해서 하는 말 아니냐?”

구록이 품에서 웅록이 건넨 버선 아홉 켤레를 꺼내 일록에게 보였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행이나 확실한 물증이 중요했다. 남의 말의 잘 믿지 않는 일록에게 아무리 어머니를 만났다고 말해야 믿지 않을 것 같아 막내 구록이 일부러 버선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냐?”

“형님, 잠깐 군화와 버선을 벗어보십시오.”

일록이 막내아우가 시키는 대로 군화와 버선을 벗고 맨발이 되자 구록이 버선 한 켤레를 얼른 일록의 녹족(鹿足)에 신켰다. 버선이 자연스럽게 일록의 발에 달라붙었다. 일록이 여태껏 수천 켤레의 버선을 신어봤지만, 지금처럼 버선이 마치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발이 잘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웬 버선이냐? 그런데 이 버선이 마치 맞춘 것처럼 나의 발에 딱 맞는구나. 하여간 새 버선을 주니 고맙구나.”

“형님, 어머님이 저희에게 주고 가신 아홉 켤레 버선 중 하나입니다.”

그제야 일록은 아우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일록은 그래도 아우들의 말이 미심쩍은지 나머지 여덟 켤레의 버선도 모두 신어보았다. 하나 같이 일록의 발에 착 달라붙었다.

“형님, 이 아우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 그래. 알았다.”

삼록이 어제 어머니 웅록을 만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일록은 어머니 웅록이 첫째부터 막내까지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 이르러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 형제가 갑자기 대성통곡하자 막사 주변을 경계하던 수나라 군사들이 막사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삼 형제가 목놓아 울고 있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삼록은 내일 고구려군의 총사령관 을지문덕이 수나라 병영으로 온다는 사실도 알렸다. 일록이 모든 정황을 알고 나서 두 아우를 다독거렸다.

“아우들아, 마음을 진정시켜라. 어머님이 이십 년 전 수나라 해적에게 납치당한 우리 형제를 아직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이 형은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을 많이도 원망했단다. 이제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장승(莊承) 스승님께서 우리 삼 형제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구나.”

일록이 장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그에게 수학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세상 삼라만상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인생은 가로와 세로로 촘촘하게 짜인 인연의 그물망에서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七情) 속에 살다가 여느 날 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고 하셨지요.”

구록이 스승 장승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꺼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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