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녹족 형제의 계략

“우리 아홉 형제 중 네 명이 어려서 비명에 갔고, 나머지 다섯 명 중 두 명은 서역(西域)으로 팔려갔으며, 이곳에 있는 삼 형제는 이십 년 만에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삼 형제가 번회(樊回)같이 올곧은 의부(義父)를 만난 것도 모두가 삼생(三生)에 걸친 인연에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오늘의 호연(好緣)이 내일은 악연(惡緣)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분 형님, 이제 우리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으니, 늘 가슴 속에 묻어둔 상흔을 깨끗이 지우고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님의 정통성을 이은 고구려의 자손입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이 수나라 오랑캐의 주구(走狗)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조국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저는 이십 년 만에 어머님을 뵈면서 느낀 바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후부터는 우리 삼 형제는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조국을 위하고,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어쩌면 장승 스승님께서 우리 형제에게 칠정을 말씀하신 것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견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언변이 좋은 삼록의 말에 일록과 구록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증오를 억누를 수 없었다. 수나라 해적에게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홉 형제는 고구려군에 몸담고 수나라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삼록이 말이 맞는다. 우리는 이제 조국 고구려의 안정과 어머님의 평안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앞으로 한 달이 고구려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가 될 것이다. 당장 내일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중문을 만나러 오신다니 우리가 만약을 위해서 미리 손을 써놔야 한다.

미친 양광이 을지문덕 장군이 휴전을 위해 스스로 찾아오거나 자수를 하면 즉시 체포하여 요동에 있는 대본영(大本營)으로 압송하라는 밀명을 두 장군에게 내린 바 있다. 을지문덕 장군이 체포되어 양광이에게 끌려간다면 살해될 것이 뻔하다. 고구려의 운명이 지금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인데, 그분이 희생된다면 고구려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일록이 두 아우와 을지문덕을 구할 방안을 논의했다. 세 형제가 이마를 맞대고 묘안을 짜내느라 고심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거야.”

일록이 무릎을 쳤다.

“큰형님, 무슨 기발한 방안이 떠올랐습니까?”

“우리 병진(兵陣)에 양광과 비슷한 허룹숭이 유사룡이 있다. 그는 우문술과 아주 친분이 있는 사이로 우문술의 각종 작전에 관여하여 조언을 해주고 있다. 그자를 이용하여 을지문덕 장군을 구해야겠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우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우리 형제가 너무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남들이 우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다. 나는 즉시 유사룡을 만나야겠다.”

일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삼록과 구록은 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는 허풍으로 유명한 자 아닙니까? 자기가 *강태공(姜太公)이나 제갈량보다 병법과 천문지리에 능통하다고 떠들고 다닌답니다.”

삼록이 제법 유사룡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그러니 내가 그자를 골탕 먹이려는 거야.”

삼 형제는 헤어져 각자의 근무 위치로 돌아갔다. 일록은 평소 아껴두던 독주(毒酒) 두 병을 들고 유사룡을 찾아갔다. 그 독주는 독사와 각종 약초를 달여 만든 술로 일록은 그 술을 마실 때마다 꿀과 함께 마시곤 했다. 술에 약한 사람은 한두 잔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했다. 일록은 유사룡을 찾아가기 전에 꿀을 반 사발 정도 복용했다. 두 사람은 같은 병영에 있으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 강태공 -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으로 은나라를 격파하고 제나라의 후로 봉해졌다.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게 누구신가? 번장군이 이 밤에 나를 다 찾아오시고?”

“혼자 술을 마시다 위무사님이 생각나서 수작이나 할까 하고 왔습니다.”

“잘 왔네. 잘 왔어. 그렇지않아도 나도 적적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네.”

“상서님은 밤마다 하늘을 보신다고 하시는데, 하늘에 뭐가 있나요? 저는 밤하늘을 보면 희미한 별밖에 보이지 않던데요?”

일록이 더펄이처럼 두 손을 들며 농담조로 말했다.

“번장군이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늘의 별들도 우리 인간들과 똑같다네. 특히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잘 관찰해야 우리가 고구려를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예견할 수 있네. 북두칠성의 움직임으로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모두 점칠 수 있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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