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을지문덕 적장을 대면하다

“자네, 조금 전에 나하고 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하네. 우리 두 사람이 나는 이야기에 수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네. 그리고 나는 산에 올라가 천문을 관찰해야 하네. 미안하지만 나머지 술은 나중에 마시세.”

일록은 유사룡의 막사를 나오면서 배꼽을 잡았다. 일록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록과 구록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밤하늘은 비가 내리려고 하는지 먹장구름이 끼며, 멀리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세 형제는 어머니 웅록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옛 추억을 더듬었다.

“징쉐이. 징쉐이. 니먼 쉬세이?”

“니먼 쉬세이?”

을지문덕과 두 수행원이 말을 달려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풀숲 좌우 측에서 한 떼의 군사들이 튀어나와 세 사람의 앞길을 막아섰다. 을지문덕과 두 수행원은 모두 고구려의 평복차림이었다. 다만, 두 수행원만 칼을 차고 있을 뿐이었다. 군사들은 수나라 별동대에서 파견 나온 척후병들이었다.

“*워문쓰 까오리 쉬첸.”

을지문덕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능숙하지는 않지만, 수나라말로 간단히 응답하자, 척후병들은 길을 터줬다. 그들은 조금만 더 가면 수나라 군대가 머무는 군영(軍營)이 나온다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척후병들도 고구려군 총사령관 을지문덕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을지문덕 일행은 다시 말을 타고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시오리 길을 달렸다. 세 사람이 거대한 병영 앞에 세워진 출입구에 도착하자 한 떼의 기마병이 달려왔다.

* 워문쓰 까오리 쉬첸(我们是高丽使臣) – 우리는 고구려사신 이다.

“당신들이 을지문덕 장군 일행입니까?”

진진이 소리쳤다.

“그렇소. 내가 을지문덕이오. 우중문 대장군에게 안내해주시오.”

“나는 통역사 진진이라 하오. 나를 따라오시오. 우중문 장군과 우문술 장군이 계시는 본영(本營)으로 장군을 모시겠소.”

을지문덕 일행은 말을 타고 수나라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 일행이 병영 안으로 들어서자 병영 안 좁은 길 좌우로 굶주린 수나라 병사들이 붉은 깃발이 달린 창을 들고 늘어서 있었다. 서 있는 병사와 병사 사이의 간격이 없이 서로 어깨를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웅록이 방문했을 때 보다 병영은 훨씬 깨끗하고 말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우중문이 병영 내 통행로에 병사들을 도열시킨 이유는 병영 내의 모습을 감추려는 조치였다. 을지문덕 일행은 말을 타고 진진의 뒤를 따라가는 도중에도 수나라 군대 진영을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아무리 병사들을 통로 좌우로 물샐틈없는 대형으로 세웠어도 말 잔등에 앉아 있으니 병영 내 막사와 시설물들 그리고 병마와 병사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 식사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막사 사이 사이에서 병사들이 앉아만 있을 뿐 어디에도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 병사들은 병장기를 들고 무질서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말들이 병영 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제지하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특히 병영 내 막사의 방향과 여러 막사가 어떤 형태로 어울려 설치되었는지 유심히 살폈다. 막사의 설치는 전투 시 진법(陳法)과도 같아서 막사를 설치한 형태에 따라 군대의 성격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이놈들 병영을 엉망으로 설치했구나. 우중문이가 진법을 전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 인분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제대로 된 병영이 아니란 뜻이렷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들이구나.’

을지문덕 일행 백여 보 앞에 대형 막사가 나타났다. 막사 앞에는 본영(本營)이란 팻말이 꽂혀 있고, 막사 좌우에는 ‘右翊衛大將軍 于仲文(우익대장군 우중문)’이란 이름이 쓰인 오색의 대형 장수 깃발이 십여 개가 꽂혀 있는데, 족히 어른 키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막사 주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초가 피어있고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었다.

을지문덕 일행이 대형 막사 앞에 다다를 즈음 막사 안에서 서너 명의 무장한 군관들이 배가 남산만 한 배불뚝이 사내 한 명과 보통 키의 중년 사내 한 명을 호위하고 나왔다. 우중문과 우문술이었다. 우중문은 누런 비단으로 지은 *한푸(漢服)를 입었고, 우문술은 파란색 비단으로 만든 한푸를 입었는데, 자그마한 체구는 우중문의 어깨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과 우문술을 만난 적이 없었다. 진진이 우중문 일행을 보자 얼른 말에서 내렸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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