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적을 기만하다

유사룡이 혼잣말로 중절 거리자 우중문은 그를 반 거둘 충이 취급하며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사룡은 황제가 보낸 위무사였고, 조정에서 벼슬도 자신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막말을 하기가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어제 웅록이란 전령이 와서 장군이 오늘 우리 수나라군 군영으로 오신다는 통보를 전하고 갔습니다. 우리는 장군께서 이 전쟁을 끝내고 양국이 화평하게 지낼 수 있는 파격적인 방안을 가져왔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문술이 먼저 운을 뗐다. 을지문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고구려군은 귀국의 대군을 맞이하여 전군이 목숨을 걸고 응전하고 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 삼백만이 넘는 군사를 동원하였고, 그중 별동대는 파죽지세로 이곳 압록수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제 압록수만 넘으면 우리 고구려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해서, 고구려는 대국인 수나라에 항복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잘 생각하시었소. 진작에 그리했어야지요. 어험-.”

우중문이 몇 가닥 안 되는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하다가 한쪽이 항복할 때에는 장군 한 사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가 우리 수나라에 항복할 의사가 있다면 당연히 국정을 책임지는 고구려 태왕이 와서 항복해야 합니다.”

우문술이 을지문덕을 노려보았다. 초면에 을지문덕에게 안온한 얼굴을 보였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우중문이 더펄이라면 우문술은 구미호(九尾狐)였다.

“우문술 대장군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오늘은 내가 고구려 태왕을 대신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현재 고구려 태왕께서는 압록수 건너 고구려군 진영에 계십니다.

일단 두 분 장군께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전하고 열흘 후에 내가 태왕을 모시고 다시 수나라 진영으로 올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존이 오고 가는 문제를 사전 절차도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을지문덕이 열흘 후에 고구려 태왕을 모시고 다시 올 예정이라는 말과 사전 절차를 꺼내자 우중문과 우문술은 눈을 크게 뜬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을지문덕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고구려의 태왕을 예의로 맞이하기 위해 요동 대본영에 상주하고 계신 황제 폐하를 이리로 모시고 와야 합니다.”

유사룡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불가하오. 여기서 요동까지는 말을 달려서 갔다가 오는데 보름은 걸리는 거리요. 차라리 고구려 태왕이 요동의 수나라 대본영으로 가는 편이 나을 듯싶소.”

잔꾀로 똘똘 뭉친 우문술이 두 눈을 치켜뜨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우리 태왕께서는 옥체가 불편하시어 말을 못 타십니다. 우마차나 걸어서 가야 하는데 그리되면 요동까지 가는데 두 달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귀국의 황제께서 이리 오는 편이 훨씬 수월하지요. 그리하면 전쟁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을지문덕이 곤란한 표정으로 우문술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고구려가 항복하는 것이니, 시간은 촉박하지 않습니다. 보름 후에 고구려 태왕과 왕비, 을지 장군 그리고 고구려 조정의 문무백관 전체가 일단 이곳 수나라 진영으로 와서 하루쯤 쉬다가 다시 요동과 압록수 사이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약속 지점으로 나오실 겁니다.”

성질 급한 우중문이 대안을 제시했는데, 고구려에게 매우 불리했다.

“좋습니다. 그리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럼, 나는 즉시 돌아가서 태왕께 이 사실을 알려고 평양성에 있는 조정의 만조백관을 속히 오라고 해야겠습니다.”

을지문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잠시만요. 을지 장군께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셨는데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을지 장군은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조촐한 술상을 보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나나 우중문 대장군이나 평소에 을지 장군을 존경해왔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만난 기념으로 함께 술 한잔 정도는 마셔야지요.”

우중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문술도 한마디 하고 따라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유사룡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중문이 막사 밖으로 나가면서 우문술과 유사룡에게 눈을 찡끗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막사 밖으로 나가자 을지문덕과 진진만 막사 안에 남았다.

“을지문덕이를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저놈을 체포하여 황제 폐하가 계신 요동의 대본영으로 압송해야 합니다.”

우중문이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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