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가짜 항복문서

한여름 밤은 병사들을 더 지치게 했다.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남쪽으로 진격하는 별동대는 낮에는 고구려군의 기습에 시달리고, 밤에는 모기와 뱀 등 해충에 시달렸다. 며칠 전에는 별동대가 야트막한 산지에서 야영하다가 수백 명의 병사가 독사에 물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밤마다 기승을 부리는 모기떼는 별동대의 피를 빨았다. 다음날 일찍 녹족 삼 형제의 예상대로 고구려군 진영에서 사람이 왔다며, 병영의 앞면에 설치된 초소가 왁자지껄했다.

“우리는 고구려군 진영에서 온 사절이다. 너희 총사령관에게 할 말이 있다.”

수나라 말을 할 줄 아는 고구려 병사 한 명이 보초병에게 말했다.

“우중문 대장군에게 여쭤보고 오겠다. 잠시 기다려라.”

웅록이 을지문덕의 명령을 받고 다시 온 것이다. 웅록은 지난번처럼 수행원 두 명을 대동했다. 세 명 모두 병장기는 들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후에 진진이 소식을 듣고 달려 나왔다. 그는 멀리서 달려오면서도 웅록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멀리 떠난 정인(情人)을 맞이하러 오는 사람 같았다.

“웅록 부관이죠? 정말로 반갑습니다. 그새 아주 예뻐지셨구려. 아니지, 멋있어졌습니다. 어서, 본영으로 가시지요. 웅부관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진진 통역사께서도 안녕하셨지요?”

“그럼요. 나는 그동안 통역할 일이 없어 입이 무척 근질근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 험지에 오셨습니까?”

“우리 태왕님의 항복문서를 가져왔습니다.”

“하, 항복문서요? 그럼, 빨리 가십시다. 마침, 여러 장수가 아침 일찍 본영에서 우중문 장군과 회의를 하는 중입니다. 나를 따라오시오.”

웅록은 진진을 따라가면서도 수나라군 진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병사들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병영 안이 대체로 조용했다. 크고 작은 막사가 풀밭에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었고, 사이사이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막사 밖에도 병사들이 군데군데 모여 잠을 자고 있는데 모두 송장 같았다. 아침이 밝았는데도 수천여 동(棟)의 막사에서는 밤 짓는 연기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웅록이 본영이란 푯말이 세워진 본영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어머님, 어서 오십시오.”

웅록의 아들 삼록과 구록이 막사 밖으로 나오며 작은 목소리로 고구려 말을 하며 웅록을 맞았다. 모자(母子)의 두 번째 상봉이었다. 웅록의 가슴이 고동쳤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을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들들아, 다시 만나는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어미는 너희들을 처음 만나고 나서 밤마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구나. 어서 이 전쟁이 끝나고 너희들을 만나 예전처럼 살고 싶구나.’

‘어머니,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소자가 안심됩니다. 어머님이 오늘 내일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삼록이 웅록에게 무언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었다.

‘어머님, 이렇게 다시 뵈니 눈물이 나려 합니다. 어찌하다가 모자가 전쟁의 한가운데서 이런 해괴한 만남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록도 어머니 웅록에게 무언의 인사를 전했다. 세 사람은 순간적이지만 서로의 눈을 맞추고 표정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두 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웅록과 수행원 등이 본영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던 웅록은 깜짝 놀랐다. 막사 안에 십여 명의 장수들이 앉아 있었다.

“고구려 사절은 인사를 하시오. 가운데 앉아 계시는 두 분은 수나라 우익위 우중문 대장군이시고, 왼쪽에 앉아 계신 분은 좌익위 우문술 대장군이십니다. 그리고 좌우로 별동대를 지휘하는 장수들입니다.”

“고구려군 총사령관 을지문덕 장군의 부관 웅록이 두 분 대장군님과 여러 장수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웅록은 지난번에 전령으로 왔을 때 본 적이 있는 우중문에게 먼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문술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하고 여러 장수에게는 가볍게 눈인사했다. 그 가운데는 큰아들 일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진이 우중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흔하오. 흔하오.”

진진과 속살거리던 우중문이 갑자기 일어나 소리치며, 손뼉을 쳐댔다. 그 바람에 우문술과 여러 장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구의 우중문이 웅록을 향해 다가갔다. 그 장면을 녹족 삼 형제가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장군님들, 기뻐하십시오. 고구려군 진영에서 온 사절단이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를 가져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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