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수나라군 휴식을 취하다

“소장은 반대입니다.”

우문술의 좌장인 일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저놈이 직속 상관인 나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해? 지난번에도 공개석상에서 나를 우습게 만들더니, 오늘 또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이야?’

우문술은 일록의 반대 입장에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봐야 했다.

“오호-, 번일록 좌장이 요즘 제법 말을 할 줄 아는구려. 어디 말해보시오.”

우중문은 우문술의 좌장이 일어서자 얼른 발언권을 부여했다. 여러 장수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그를 응시했다. 일록의 두 아우도 형이 엉뚱한 소리를 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우리 수나라가 고구려 태왕을 모셔다 놓고 엎드려 절을 받는 유치한 짓은 만천하에 비웃음을 살 수 있습니다. 저들이 스스로 우리 진영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겁니다. 대국인 우리 수나라가 항복한 나라 왕을 찾아가는 일은 어불성설입니다.”

일록이 황제를 언급하자 여러 장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맞습니다. 대국이 어찌 항복하는 소국(小國)을 찾아가 마치 구걸하듯 하는 행동은 비열하기 그지없습니다. 고구려 태왕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사이에 우리 별동대는 내호아 장군이 이끄는 해군과 접촉하여 군량미를 보급받아야 합니다. 시간은 이제 우리 수나라 편입니다.”

일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삼록이 우중문과 여러 장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당연합니다. 우리 수나라 별동대가 수많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이곳까지 힘들게 왔습니다.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까지 받은 상태입니다. 남진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고구려군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산야(山野)에는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국의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장이 판단하기로는 하루 이틀 안으로 반드시 고구려 태왕이나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리 병영으로 오실 것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전쟁의 종결을 앞두고 바람난 계집애들처럼 엉덩이가 가벼우면 절대 안 됩니다. 무조건 기다리는 게 상책(上策)이고, 우리 수나라 측에서 찾아가는 것은 실효성 없는 하책(下策)이라 봅니다.”

이번에는 녹족 삼 형제의 막내며 우중문의 돌격대장인 구록이 열변을 토해냈다. 남산만 한 덩치에서 나오는 언변에 그만 여러 장수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의 쾌변(快辯)에 우중문은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여러 장수도 그가 우중문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할 말이 없습니까? 없으면 우리 수나라 별동대는 이곳에서 병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 장수와 병사들은 그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몸이 아픈 병사들을 돌보며, 나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기 바랍니다.”

우중문의 결단에 별동대는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사들의 굶주림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병사들이 쫄쫄 굶고 있는 반면에 군관급 이상 여러 장수는 각자의 막사에서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며 여유를 부렸다. 별동대 병사들은 군 진영에서 나와 산과 들로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땅을 파서 뱀이나, 쥐, 개구리를 잡고, 개천이나 논의 도랑을 헤집으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이 잡은 물고기는 피라미나 송사리 또는 미꾸라지가 전부였다. 어쩌다 재수 좋으면 붕어나 잉어 새끼가 잡히기도 했다. 또한,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속을 긁어내 주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나 나무속은 병사들의 빈 배 속을 채우지 못했다.

“장군님, 수군 진영에 파견되었던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우중문이 삼십 리 밖에 군영을 꾸리고 우리 쪽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웅록의 보고에 을지문덕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호로자식들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지난번 소관이 전한 항복문서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맞아. 그때 웅록 부관이 수고했지. 내일 또 한 번 수고를 해줘야겠네.”

“한번이 아니고 백번이라도 좋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좋아. 나는 우중문에게 보낼 시를 한 편 구상하고 있네.”

사령관 막사 안에 을지문덕과 웅록 두 사람만 있었다. 이전에도 막사 안에 둘이 있을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때 을지문덕은 웅록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을지문덕이 웅록을 대하는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직속 부하이면서 여인으로 웅록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을지문덕이 웅록보다 10년 연상이었다. 을지문덕이 직접 찻물을 끓여 차를 우렸다. 차를 우려내는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웅록은 신기한 듯 을지문덕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찻잔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두 사람의 가슴까지 덥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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