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을지문덕의 은애

“장군께서는 고구려에서 이름난 문장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식한 오랑캐들이 장군님의 시문을 읽을 수 있을지 의심입니다.”

“우중문이나 우문술을 겨우 문자나 읽을 수준이고 유사룡이란 자는 제법 글줄깨나 읽은 자로 알고 있네, 그자라면 나의 의중을 알 수도 있을 것일세. 그 세 놈 다 까막눈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웅부관, 투구와 갑옷을 벗게. 이 막사 안에는 나의 허락 없이 아무도 못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자네가 들어오고 나서 막사 밖에 있던 보초병들을 백 보 이상 떨어지게 했네.”

을지문덕의 말에 웅록이 배꼽을 잡았다. 영락없는 여인의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을지문덕도 덩달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웅록의 예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고구려 장군으로서 남정북벌하며, 전장(戰場)을 돌아다니느라 여러 해 동안 여인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었다.

웅록은 아침에 눈 뜨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거의 투구를 벗지 않았다. 그의 긴 머리가 행여 동료들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게 할까 우려해서였다. 웅록이 투구를 벗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갑옷까지 벗고 나니 붉은색 저고리 차림의 원숙한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록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장군님, 기대됩니다. 소관도 시문을 좋아합니다. 긴 문장의 율시보다 의미가 함축적이고 비유법(比喩法)이 내재한 절구(絶句)나 고시(古詩) 종류를 즐겨 읽습니다.”

“자네는 여인의 몸으로 무예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일가견이 있구먼. 누구 시문을 즐겨 읽는가?”

을지문덕의 물음에 웅록이 잠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을지문덕은 찻잔을 잡고 웅록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했다.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코 물을 건너시고 말았네

늘 긴장감이 감돌던 을지문덕의 장군 막사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노랫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진면목을 보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여인이로다. 그동안 내가 옆에 진주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녹족부인이 부르는 이 노래는 조선시대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부른 노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다. 수나라 해적들에게 아들 아홉을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화병으로 저승에 든 지아비를 그리는 노래로다. 녹족부인이 나에게 온 것은 고구려 천지신명의 계시가 틀림없다.’

을지문덕은 조용히 공무도하가를 노래하는 웅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정의 고저장단에 따라 그녀의 설움과 애환이 노래 속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墮河而死 타하이사

當奈公何 당내공하

님께서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내 가신 님을 어찌할꼬

을지문덕은 웅록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덧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와 아내를 떠올리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불철주야 자식과 남편의 무탈을 위해 천지신명께 치성을 올리고 있을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노래가 끝났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노래를 마친 웅록이 살며시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웅록이 손수건을 꺼내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인의 손길이 뺨 위를 스칠 때 을지문덕은 눈을 번쩍 떴지만, 웅록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두 사람의 숨소리만 막사 안에 가득했다.

“웅부관이 그처럼 시문에 뛰어난지 몰랐네. 오늘부로 다시 그대를 보게 되었어. 화답으로 이번에는 내가 시 한 수 읊어보겠네.”

“어머나! 장군님, 기대됩니다.”

을지문덕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훨훨 나는 꾀꼬리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을지문덕은 고구려 제2대 유리태왕(琉璃太王)이 지은 황조가를 노래했다. 이 노래의 소재는 꾀꼬리로 사랑하던 임을 잃은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며, 인생의 무상함을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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