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여수장우중문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 그대가 싸움마다 이겨 군공(軍功) 이미 높으니 잠시 차 한잔을 마시고 가벼운 체조를 마친 을지문덕이 다시 붓에 먹물을 묻혔다. 웅록은 다시 한번 가슴을 졸이며 그의 붓끝을 응시하였다.

전구(轉句)를 써 내려가는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했다. 웅록은 전구를 쓰고 잠시 창밖을 응시하는 을지문덕을 위해 얼른 빈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일직선이 되었고 웅록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심장이 요동쳤다.

 기문둔갑술 –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비술로 제갈량

같은 병법가들은 이 묘술을 전쟁에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을지문덕은 묘한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웅부관, 기승전구는 그런대로 괜찮은 듯한데, 결구를 어찌 쓰면 좋을까?”

“천문지리에 통달하신 분은 우중문이 아니라 바로 장군님이십니다. 장군님은 이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기문둔갑술을 자유자재로 응용하시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지혜를 어찌 민충한 일개 부관이 알 수 있겠습니까?”

웅록이 어렵게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허허-, 자네도 병법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오늘은 너무 겸손하네그려. 자네의 의지도 이 시문에 담고 싶어서 그러네.”

을지문덕이 웅록이 답변이 있을 때까지 잠자고 앉아서 또 창밖을 응시했다. 군 막사의 창은 어른 팔 길이 크기로 네모난 구멍 두 개가 나 있었다. 웅록은 두 번씩 우중문을 만나 그의 품성(稟性)을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을지문덕이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하여 시문의 결구에 웅록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어 했다.

“장군님, 우중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랑캐들 모두가 우리 군사들의 창칼에 어육이 될 수 있다는 뜻도 은연중에 넣으시고요.”

“알겠네. 좋은 생각일세. 기승전결의 품위를 살려서 그리 써봄세.”

을지문덕이 다시 붓을 들었다. 웅록은 먹을 갈면서도 시선은 붓끝에 고정되었다. 을지문덕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일필휘지로 마무리하였다. 오언고시로 시 짓기를 마친 을지문덕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이제 싸움을 그만두기 바라노라

“장군님, 명문입니다.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는 감히 근처에도 올 수 없습니다. 귀신이 놀라고 하늘이 경기(驚氣)를 할 정도입니다. 곰 같은 우중문이나 여우 같은 우문술이 장군님의 오언고시를 읽으면 정신이 혼미하고, 무엇을 어찌할 줄 모르고 지리산가리산할 것 같습니다. 그자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웅록은 을지문덕의 시문에 경탄하며 손수건을 들여 그의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마치 정겨운 연인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사는 땅이 스스로 돌고 돌아 밤과 낮이 생기고 계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특히, 북쪽 하늘에 자리한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을 포함하는 삼원(三垣)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기운이 연월일시(年月日時) 매 순간 달라지는데, 이때 그 기운이 사람에게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 기문둔갑술이다. 그러므로 기문둔갑은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비술인 것이다. 촉한 유비의 군사(軍師) 제갈공명은 기문둔갑을 이용한 포진법(布陣法)을 써서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요동 대본영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수나라 황제 양광은 평양성으로 급파한 별동대가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자 노발대발하였다. 그는 적어도 한 달 반 안으로 우중문이 승전보를 보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양광은 군부를 압박하며 조속히 평양성을 점령하라고 채근했다.

내호아가 이끄는 해군이 바닷길을 통해 먼저 평양성 인근에 도착했지만, 우중문이 이끄는 별동대를 기다리지 못하고 별도로 작전을 펼치다 군사 4만여 명을 잃자 양광은 내호아를 죽이려 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내호아는 우중문에게서 평양성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나라 해군이 고구려 태왕의 아우 고건무에게 혼이 나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며, 고구려군의 빈번한 기습으로 보급로도 끊긴 상태로 섬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구려 태왕은 수나라 별동대를 최대한 평양성 가까이 끌어들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거짓 항복문서까지 작성하여 을지문덕에게 건네며 고구려의 운명을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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