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녹족부인 다시 아들을 만나다

웅록은 주머니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 고구려군의 공격 지점과 전술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삼록은 웅록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서 수시로 막사 출입문을 주시하였다. 웅록은 모든 기밀 사항을 삼록에게 일러주고 나서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아들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20여 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자지간이라 행여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는 차원이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별동대는 살수에서 거의 전멸될 겁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저희 형제는 별동대가 섬멸된 후에 어머님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갈 것입니다. 일록 형님과 구록 아우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머님께서 막중한 일을 하시는 과정에서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환인, 환웅,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하늘의 후손이며, 고구려의 아들들이다. 수나라 오랑캐들과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물과 기름 같아서 절대로 섞일 수 없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고구려군이 완벽한 승리를 할 때까지 너희가 앞장서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별동대가 도망치면 요동에 있는 양광의 대본영 군대와 합류한 뒤에 또다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해 올 것이다.

그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 도망치는 별동대를 철저히 섬멸해야 한다.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 어미의 말을 명심 또 명심하거라.”

“어머님,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웅록은 막사를 나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자 분통을 터트리며, 아쉬워하는 자는 바로 우문술이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우중문의 눈꼴틀린 모습이 보기 싫어 그는 혼자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별동대의 총지휘권이 우중문에게 있으니 자신이 아무리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여도 우중문은 동문서답만 할 뿐이었다.

‘나 혼자만이라도 도망칠 궁리를 해야겠다. 저 불학무식한 우중문이와 같이 있다가는 고구려군의 칼에 내 목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문술은 주요 문서들을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밤늦게까지 풍악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밤이 되도록 고구려 태왕 고사하고 고구려 진영에서는 졸병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겁이 덜컥 난 유사룡은 을지문덕의 시문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다.

자신이 여러 사람 앞에서 시문을 자신 있게 해석하였고, 우중문 이하 장수들은 그의 말만 믿고 모두 고주망태가 된 상태였다. 장수들뿐만 아니라 중간급 군 간부들도 모두 대취한 상태여서 만일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별동대는 전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 기구와 승구의 내용은 우중문을 칭찬하는 것 같은데, 전구에서 한번 말을 틀더니 결구에서는 조롱하는 내용이로다. 우문술이가 해석한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이가 기문둔갑술을 통달했다는 것 아닌가? 기문둔갑은 손무(孫武)나 그의 후손인 손빈(孫臏) 혹은 제갈공명 같은 전쟁의 귀신들이나 사용할 줄 아는 비술(秘術)이다.

천문지리에 통달해야 천체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에 응용하는 그 기술이야말로 모든 장수가 터득하고자 하는 바 아닌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우중문은 대취하여 무희들을 껴안고 육림(肉林) 속에서 노닐고 있을 덴데. 허-, 내가 어쩌다 별동대의 위무사가 되어 이 고생하는 것인가? 내가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우중문에게 찾아가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유사룡은 우중문이 묵고 있는 본연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서 두 명의 초병이 문 양쪽에 서서 졸고 있었다. 유사룡이 다가가자 초병이 그의 앞을 막았다.

“급한 일이다. 우익위대장군을 만나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안 됩니다.”

“왜 안된다는 게냐? 한시가 급하다고 하는데.”

“지금 대장군께서 한참 그 일을 치르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 일이 끝나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시던지요. 보통은 날이 밝아야 그 일이 끝난 거든요. 대장군께서 그 일을 치르는 데 방해하면 목이 떨어집니다.”

초병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일이라는 게 뭐냐?”

“에이, 위무사님도 원. 정말로 그걸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대장군님은 매일 밤 그 일을 치르시는데요. 왜 있잖아요. 세상은 음과 양의 조화 속에 만물이 태어나고 사위어가고 하는 뭐 그런 거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암수가 한 몸이 돼야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고 또한 오묘한 인생의 묘미를 느끼는 거 말입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그거 뭐냐?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란 말이 딱 맞을 거 같은데요.”

유사룡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차마 막사 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안을 기웃거리다 묘한 소리에 귀를 세웠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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