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수나라 오랑캐를 섬멸하라

태왕은 웅록의 가녀린 손을 잡아주었다. 웅록은 태왕의 치하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태왕이 웅록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옆에 서 있던 을지문덕은 헛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고 애썼다. 일개 참모가 태왕에게 치하를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폐하, 이 길로 웅록 부관과 곧장 살수로 달려가겠습니다. 폐하의 지엄하신 명령대로 오랑캐들을 섬멸할 것입니다.”

“짐은 을지 장군과 웅부관을 믿습니다.”

태왕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을지문덕과 웅록이 기마대 수천 명을 이끌고 북녘을 향해 달렸다. 태왕은 망루(望樓)에 올라 전장으로 달려가는 을지문덕의 군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태왕은 아우 고건무에게 평양성으로 통하는 물길과 육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도록 했다.

태왕은 지난번에 대패하고 물러간 내호아 군대가 다시 평양성을 급습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호아가 우중문과 연계한다면 평양성을 방어하는 고구려군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이 알아서 판단할 차례였다. 평양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청명하고 높았으며, 무심한 구름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양성은 성을 방위하는 병력 일부만 남아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도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평양성 밖 30리 지점에 수나라 별동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태왕이 피난을 가지 않고 도성에 남아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자 백성들은 태왕을 뜻을 지지하며 남녀노소가 필승의 의지를 불태웠다.

노인들과 아녀자들은 만일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으로 진격해 온다면 창칼을 들고 맞서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전시를 대비하여 수시로 기초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아녀자들도 창칼을 다루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당장 차출되어 전선에 투입되어도 능히 전사로 제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집집마다 병장기가 비치되어 있었으며, 각종 조직에 가담하여 언제든 출동할 태세가 된 상태였다. 또한, 연로한 남자들도 나라의 부름이 있으면 지게를 지고 나가 병장기나 군수 물품을 나를 수 있는 상태였다.

“뭐요?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요?”

“어젯밤에 천문을 보니, 하늘이 조화를 부려 우리 별동대에게 액운을 안겨줄 점괘를 보여줬습니다. 대장군, 빨리 철군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이 늦었습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우리 별동대가 전멸을 당할 것입니다.”

유사룡이 우중문 앞에서 손을 비비며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그대가 나에게 고구려 태왕이 올 것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어제는 어제입니다. 대장군, 한시가 급합니다.”

우중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금방이라도 유사룡을 때려죽일 것만 같았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였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참모들이나 병사들은 몸을 숨기기 바빴다. 우중문이 겨우 진정하자 우문술이 찾아왔다.

“우익위대장군, 지금이라도 철군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어차피 늦었습니다만, 우리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병사들은 몰라도 우리 장수들은 고구려군에 생포되면 참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서 속히 짐을 싸서 퇴각합시다.”

우중문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가 삼록과 구록을 불렀다.

“너희들은 전군에게 빨리 살수 쪽으로 퇴각하라고 전하라. 무거운 짐은 버리고 가도 좋다. 몸만 챙겨 철군하라고 해라.”

삼록과 구록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타고 병영을 누비며 우중문의 명령을 하달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설세웅, 신세웅,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 등 장수들도 자신의 휘하 병사들에게 빨리 철군하라고 독촉했다. 별동대의 진영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상당수의 병사는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발 빠른 병사들은 이미 진영을 빠져나와 삼삼오오 도망쳤다. 군대의 질서정연한 행군 대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매에게 쫓기는 토끼 떼처럼 별동대 병사들은 북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수나라 별동대 중에서 병든 자와 운신하기조차 어려운 자들은 맨 뒤로 쳐져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군대의 일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채 죽기 살기로 북쪽으로 향하는 거지 떼와 같았다.

우중문은 낙오된 병사들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말을 탄 별동대 지휘부와 기마대 등 선두는 이미 살수 근처에 접근하고 있었다. 별동대 병사들이 군영을 거의 다 빠져나가고 한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고구려군이다. 고구려 철갑기병대가 온다.”

“빨리 도망쳐라. 꾸물거리다가 죽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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