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을지문덕의 몽중인

“대장군, 잠시도 지체하면 안 되오. 고구려 기병대가 추격해오고 있소이다.”

“시끄럽소이다. 당신은 총애하는 부하가 전사하여도 그리 비정하게 말할 거요? 살고 싶으면 당신이나 먼저 가시오.”

우중문이 우문술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대장군들은 싸우지 마시오. 좌익위대장군 말씀이 맞아요. 곧 고구려군이 들이닥칠 것이오.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오.”

유사룡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다.

“저 압록수에도 우리 별동대를 기다리는 야수 같은 고구려놈들이 있을 것이오. 유 위무사, 어찌하면 좋소?”

“대장군, 우리 모두 한곳으로 압록수를 건너가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지금 대략 세어보니 일만 명의 기병들이 있소이다. 우리 지휘관들은 저 뒤의 능선을 넘어 강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고 나머지 기병들은 직선으로 압록수를 건너가게 해야 합니다. 고구려군을 속여 지휘부만이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거 아주 기막힌 계략이오. 그리합시다. 설세웅과 최홍승(崔弘昇)은 방금 위무사께서 하신 말씀대로 해라. 그리해야 지휘부가 무사히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

‘나쁜 놈들, 지휘관이란 놈이 저 살 궁리만 하는구나. 내가 저런 놈을 상관이라고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참으로 딱한 인생이로구나.’

설세웅은 우중문의 명령을 받들어야 했다. 그는 기병대에게 곧바로 압록수를 건너가라고 명령했다. 우중문, 우문술을 비롯한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우익위장군 설세웅,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 검교우어위대장군 위문승 등 별동대 지휘부와 눈치 빠른 자들, 대략 7백여 명이 능선을 넘어 강기슭을 따라 북동쪽으로 달렸다. 별동대 지휘부가 북동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그만 고구려군이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오랑캐 놈들이 압록수를 넘고 있다. 한 놈도 건너게 하면 안 된다. 자랑스러운 고구려 전사들이여, 저 오랑캐들을 모두 압록수의 물고기 밥이 되게 하라.”

“고구려의 철천지원수 놈들이다. 모두 수장시켜라.”

철갑중기병대를 지휘하여 달려온 을지문덕과 웅록은 수나라 별동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웅록은 말을 타고 앞장서서 기병대와 함께 압록수로 뛰어드는 별동대를 후미를 공격했다. 압록수 남북 양쪽 강기슭에서 화살이 별동대를 향해 빗발쳤다. 병사들 비명, 말 울음소리,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일각도 안 돼서 압록수는 핏물로 물들었고 황해에서 날아온 갈매기들만 무심하게 강 위를 날아다녔다. 압록수를 건너던 일만여 명의 별동대 중 8천여 명이 압록수에서 고구려군에게 희생되었다. 그 와중에도 별동대는 마구(馬具)나 갑옷, 나무토막 등을 엮어 구명대(救命帶)를 만들어 타고 황해로 떠내려갔다. 고구려군이 보는 앞에서 압록수를 건너간 별동대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 고구려가 승리했다. 수나라 오랑캐들은 모두 어육이 되거나 용왕님을 뵈러 갔다.”

“대고구려 만세.”

“을지문덕 장군, 만세.”

“웅록 부관님, 만세.”

해가 뉘엿뉘엿 서산 아래로 지고 있었다. 압록수는 다시 조용해졌다. 7월 하순 가장 무더운 날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2차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을지문덕과 웅록은 얼싸안고 승전의 기쁨을 나누었다. 고구려군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을지문덕은 전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군 지휘부는 조촐한 자축연을 벌였다. 을지문덕은 여러 장수의 노고를 위로하고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지난 두 달은 고구려 역사 650년 만에 최대 고빗사위의 나날이었다. 고구려군의 승리는 을지문덕의 탁월한 지도력과 고구려 전 백성이 일치단결한 결과였고, 고구려를 지켜주는 천지신명과 조상들의 응원 덕분이기도 했다.

“장군님, 소관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웅록이 자축연이 무르익을 무렵 을지문덕을 막사 밖으로 불러냈다.

“왜 그러는가? 혹시 아들들이 찾아왔는가?”

“장군님, 소관이 작별 인사를 올립니다.”

웅록은 그 자리에서 을지문덕에게 큰절을 올렸다. 웅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을지문덕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압록수까지 고구려군을 진두지휘하면서 녹족 삼 형제의 안위를 걱정했다. 웅록이 잠시 보자고 했을 때 을지문덕은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시려는가?”

“강 건너에서 세 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장군님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20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 육록이와 팔록이를 찾아야 합니다. 그 두 아들은 장안(長安)의 인간 시장에서 페르시아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습니다. 요즘 들어 그 애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납니다.

우선 세 아들과 장안으로 가서 노예 상인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저의 두 아들이 사는 곳이라면 인도, 페르시아, 비잔틴 등 그 어디라도 찾아가서 반드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장군님, 이렇게 이별을 고하는 무례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장군님이 보고 싶으면 저는 무산(巫山)의 신녀 처럼 아침에 구름이 되었다가 밤에 비가 되어 내리는 흉내는 낼 수 없지만, 매월 보름밤, 저 달님에게 장군님의 안부를 묻고 저의 소식도 알리겠습니다. 이제 떠나면 십 년이 걸리든 또는 백 년이 걸리든 아니면 천만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고구려로 돌아와 장군님을 찾아뵐 것입니다.”

웅록이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이런 날이 올 줄 예상은 하고 있었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자네와 이별할 줄 몰랐어. 오늘 밤부터 꿈속이라도 상관없으니 찾아오게. 이제 나도 몽중인(夢中人)을 두었으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 것이야. 꼭 돌아와야 하네. 나를 영원히 오매불망(寤寐不忘)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지 마시게. 그리고 자네와 자네 아들들은 자랑스러운 고구려 후예들이네. 부디, 몸조심하고 무탈하길 빌겠네.”

“장군님-.”

을지문덕은 흐느끼는 웅록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웅록의 가슴이 고동치면서 웅숭깊은 사나이 가슴에 온기가 전달될 때 을지문덕도 눈물을 쏟아냈다. 을지문덕은 막사로 들어가더니 금덩이가 든 상자를 가져와 웅록에 건넸다. 상자를 열어보던 웅록은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녘에서 달이 오르면서 사방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웅록이 을지문덕에게 작별을 고하고 압록수를 향해 가자, 을지문덕은 배웅하기 위해 웅록을 따라나섰다. 그때 강 건너에서 횃불 세 개가 빙빙 돌고 있었고, 강 양쪽에서 수천 마리의 사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웅록이 강을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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