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호전적인 거란왕, 야율융서

웅숭깊고 오달져 보이는 홍 씨 부인의 뺨 위로 매작지근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관의 부모는 병사들로부터 아들의 무용담을 듣고 겉으로는 무척 대견해 했다. 애전 전투에서 전사한 대부분의 고려군은 북계의 *강동 육주 출신이었다.

전쟁 끝물에 강동 육주에 있는 마을들 대부분이 초상(初喪) 촌이 되다시피 했다. 관아에서는 전사한 사람들의 가족에게 약간의 부조를 하고 현령이 마을을 돌며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 마을마다 공동묘지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있어야 했다.

‘이관이 애전 전투에서 아과수란 거란 장수와 일대일로 싸우고 있는데 야살스러운 거란 놈들이 활로 이관을 공격해서 낭패를 봤다는군. 아과수란 놈이 함정을 판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그 오랑캐 장수 놈은 이관의 언월도에 머리통이 날아갔을 거야.’

‘오랑캐들은 고려군과 싸울 때 온갖 비열한 짓을 다 한다고 들었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을 잃었네. 그에게 아들이라도 있었으면 아비의 무공을 이어받아 장차 무관이 될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딸 하나만 덜렁 남기고 허망하게 갔으니 누가 그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을꼬.’
* 강동 육주 – 지금의 평안도에 있던 흥화진, 귀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로 군사 요충지였다.

덕실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이관이 거란 장수와 싸우다 어떻게 피살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설화는 마을 아낙들로부터 아버지가 아과수의 비열한 행동으로 전사한 이야기를 듣고 복수를 다짐했다. 설화는 아버지가 남긴 시문을 읽을 때면 옛 생각에 빠져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무술을 더 연마하여 고수가 된 다음에 아버지 원수를 찾아갈 겁니다. 그 원수가 지옥에 있다면 지옥이라도 찾아가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드리겠습니다.’

설화는 이관이 남긴 시문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했다.

거란은 옛날에 고구려의 통치를 받던 몽골 부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북방의 초원지대나 몽골 등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부족들과 뒤섞여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참 후에 거란족의 실력자 *야율아보기란 자가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건국하였다. 절대로 거란 오랑캐들을 믿으면 안 된다. 거란 오랑캐는 *효경과 같은 족속들이다. 네가 혹시 나중에 그들과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비의 말을 명심해라. 그들은 고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흉악한 종족들이다. 고려가 힘을 키워 그들을 정복하고 영원히 우리 겨레의 종으로 둬야 한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두 해가 지나서 태봉국의 왕건(王建) 장군이 학정을 일삼던 궁예와 그를 추종하는 흉포한 세력을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고려는 발해 유민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금수의 나라라 부르며 멸시하였다. 거란의 두 번째 왕인 야율덕광(耶律德光)이 고려와 화해하기 위하여 선물로 낙타 오십 마리를 개경으로 보내왔다. 왕건 황제는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어 두고 굶어 죽게 했고 사신단 서른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단다. 이때부터 거란과 고려는 서로를 적대시하며 견원지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 야율아보기 - 耶律阿保機, 중국 북서 변경을 점령한 거란족의 지도자로 916년 거란국을 세웠다.

* 효경 - 梟獍,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 은혜를 모르는 사악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함.

‘아버지, 사람들은 거란 왕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올 거라고 난리입니다. 거란 왕이 우리 성종(成宗) 임금 때에도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침입했다면서요?’

이관은 호기심 많은 딸에게 거란과 고려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설화는 또래 아이들보다 명민하여 한번 들려준 이야기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관은 딸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고명한 선생을 초빙해 글공부를 시켰다.

야율아보기의 후손 *야율융서가 거란의 최고 통치자가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거란의 다섯 번째 왕, 야율현(耶律賢)의 장남이었다. 야율현이 급서하자 아들 어린 야율융서가 열두 살 나이로 졸지에 왕이 되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야율융서의 생모 *소작이 섭정하였다. 고려 성종 임금 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전쟁도 소작이 아들 야율융서에게 사촉하여 발발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거란이 고려를 완전히 복속하지 못하면서 그녀는 야율융서에게 수시로 고려를 정벌하라고 주문하였다. 소작의 뒤에는 한덕양(韓德讓)이 있었다. 소작은 남편인 야율현이 죽자 재상인 한덕양과 눈이 맞아 허구한 날 감탕질과 요분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지시와 명령은 음흉한 간부(姦夫)인 한덕양의 의중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충한 야율융서는 음황한 한덕양을 친부처럼 받들었다.
* 야율융서 – 耶律隆緖. 거란 6대 왕으로 고려를 세 차례 침공함.
* 소작 - 蕭綽(953-1009). 거란 왕비. 야율현의 왕비로 어릴 때의 자는 연연(燕燕), 승천태후로도 불린다.

소작의 아들 야율융서가 친정하면서 거란은 어느 정도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그는 포악한 생모 소작 밑에서 탐욕의 정치를 배우며 자란 탓에 호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현재의 거란 영토와 백성으로 충분히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야율융서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하여 대륙의 하서 지역인 회흘(回紇)을 정복하고 서역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다.

또한, 무력으로 송나라를 압박하여 *전연지맹이라는 불평등 늑약을 체결했다. 이 늑약에 따라 거란은 송나라로부터 매년 비단 이십만 필과 은(銀) 십만 냥을 세폐로 받았다. 거란 백성들에게는 그의 본명 야율융서보다 아명인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로 더 알려져 있었다. 문수노는 문수보살의 제자라는 뜻이다. 그는 감히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쓰면서 행동은 금수와 다를 바 없었다.

나라 살림이 넉넉해진 거란은 정치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태조 왕건의 유지에 따라 고려가 계속해서 거란을 적대시하자, 야율문수노는 고려와 송나라에 호의적인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키고 압록수 유역에 성을 쌓는 등 고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영바람이 잔뜩 든 야율문수노는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거나 눈에 거슬리는 세력은 반드시 응징해야 직성이 풀렸다.
* 야율융서 – 耶律隆緖, 거란국 제6대 왕. 호전적인 인물로 주변국을 정벌하고 고려를 세 번이나 침범했다.
* 전연지맹 - 澶淵之盟, 1004년에 송나라가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주(澶州)에서 맺은 불평등 강화늑약.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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