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설죽화 <5> 스승의 여제자에 대한 기대

황음무도한 야율문수노는 그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올해로 마흔여섯인 그는 풍신이 장대하고 상당한 호색한으로 소보살가(蕭菩薩哥) 등 부인 세 명을 두었다. 그 외에 첩으로는 귀비 소씨(蕭氏) 등 열여섯 명을 두었고 자식은 야율종진 외에 스무 명이 넘었다.

고려 성종(成宗) 십 년, 거란의 부마이자 동경유수인 *소항덕은 팔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동원한 군사는 육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거란 왕 야율문수노의 누이인 야율연수녀와 혼인한 거란의 부마였다.

소항덕은 거란이 송나라와 전쟁을 할 때 최전선에 나가 공을 세웠다. 그는 전쟁 경험이 많아 고려쯤은 쉽게 굴복시킬 것으로 여겼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란의 침입을 맞아 조정에서는 시중 박양유(朴良柔)와 내사시랑 서희(徐熙) 등을 파견하여 거란군을 대적하게 했다. 고려 성종 임금은 친히 안북부까지 출전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 소항덕 – 蕭恆德, 소배압의 동생으로 손녕(遜寧)은 그의 자(字)이다.

고려 조정 중신들은 항복론과 할지론을 놓고 둘로 갈라져 목소리를 높였다. 항복론은 ‘고려가 거란에게 항복을 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할지론은 ‘고려 서북면 영토 일부를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새로운 국경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많은 대신이 할지론에 찬성하면서 대세로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희와 간의대부 이지백 등이 거란에 대한 항전을 주장하자 자주 의식이 강했던 고려 성종 임금도 항전론으로 전향하였다. 소항덕은 고려가 항전을 택하자,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면서 고려에 강화(講和)를 제안하였다.

소항덕은 야율문수노의 생모 소작의 명령을 받고 출전은 하였지만 확전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때 고려 측의 대표로 서희가 나서서 소항덕과 담판을 벌였는데, 고려가 여진족을 통제하는 대가로 강동 육주를 요구하였다. 이에 소항덕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논리를 폈다.

거란은 다른 지역을 정벌하고자 할 때 고려와 여진족이 배후에 있어 불안했다. 그런데 서희가 ‘거란이 고려에게 강동 육주 지역을 떼어주면 고려가 여진족을 진무하겠다’고 하자, 어둔한 소항덕은 좋은 방안이라 생각하고 즉시 소작에게 전령을 파견하였다. 소작과 한덕양 역시 소항덕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작의 지시에 따라 소항덕은 강동 육주를 고려에 넘겨주고 창황분주하게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거란은 강동 육주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송나라 정복에 있었다. 거란 지도부는 거란이 송나라를 정복하고 나면 고려는 자연스럽게 복속될 것으로 확신했다. 고려-거란 일차 전쟁은 고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려-거란 일차 전쟁이 끝나고 칠 년이 지나 이부상서참지정사 강조(康兆)에 의해 목종(穆宗) 임금이 폐위되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서 이듬해 거란 왕은 고려에 선전 포고하였다. 고려의 정세가 불안하자 야율문수노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직접 사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수를 건넜다. 이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고려 황제는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여 삼십만 대군을 주고 거란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야율문수노는 강동 육주만 손에 넣으면 곧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남진하여 *서경을 함락시키고,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도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강동 육주에 주둔한 고려군은 한 달 가까이 거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되레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흥화진은 강동 육주 중에서도 최북단에 있는 군사 요새로 최정예 고려군이 지키고 있었다.

서북면도순검사 양규(楊規)는 진사 정성(鄭成) 등 여러 장수와 합심하여 흥화진을 지켰다. 야율문수노는 양규를 회유하며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규는 그의 회유를 무시했다. 다급해진 야율문수노는 흥화진을 뒤로하고 남진하여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 삼십 만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아쉽게도 고려군은 삼수채(三水砦)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패하고 강조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 황제 – 새로운 황제는 태조 왕건의 손자 순(詢)으로 고려 제8대 현종 황제.
* 서경 – 西京, 지금의 평양.

“설화야, 지난번에 배운 내용을 복습해 보겠다. 맹자 진심장구 상편 이십팔 장과 이십구 장의 내용과 뜻을 말해보아라.”

설화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여천(麗川) 선생은 송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달사이며, 많은 한적(漢籍)을 접하여 모르는 글이 없었다. 그는 이관의 요청으로 설화에게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병법서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이관은 딸에게 검술을 가르쳐보니 사내들도 따라 하기 어려운 각종 기술을 쉽게 익혔다. 설화는 검술을 배우는데 절대로 기신대거나 뜨악해하지 않았다. 그는 설화에게 무술뿐만 아니라 병서를 가르치면 언젠가 크게 쓰일 때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여천 선생은 귀주성 안에 살면서 열흘에 한 번씩 덕실 마을을 방문하였다. 처음에 그에게 글공부를 배우던 마을 학동들이 서너 명 있었다. 천자문을 끝내고 경서(經書)를 접하자 학동들은 그만 어렵다며 글공부를 포기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하혜(柳下惠)는 삼공(三公)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였음에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또한, 어진 행동을 하는 자는 우물 파는 것과 비교되니 우물을 아홉 길까지 파도록 샘물에 이르지 못하면 우물 파기를 그만두는 것과 다름없다.

“수고했다. 이십팔 장의 내용과 의미를 잘 알고 있구나. 부언하면 이렇다. 노나라 대부 유하혜는 어진 것을 절대 숨기지 않고 반드시 법대로 실행하였다. 군주에게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액궁을 당해도 근심하지 않았다. 그는 바른 법도로 군주를 섬겼으며 이에 세 번이나 쫓겨남에 이르렀다. 이것이 변치 않는 그 절개이다.

고려 조정에도 유하혜 같은 인물이 많아야 나라의 기틀이 바로 서고 천년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거란족에게 두 번이나 큰 전란을 당하고 있는 이유도 조정에 *유하혜 같은 인물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고려 조정에도 그와 같은 재상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이십구 장의 내용과 뜻도 잘 알고 있구나.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승겁드는 것은 없다. 부단한 노력과 성실함에는 당할 자가 없다. 어짐에 있어서는 요임금에게 미치지 못하고 효를 행함에 있어서는 순임금에게 미치지 못하며, 배움에 있어 *공구(孔丘)에 이르지 못하면 끝내는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행함에 있어서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스스로 이루기 전에 버리는 것이니라.
* 유하혜 -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 나라의 대부. 본명은 전획(展獲)이다. 사사(士師)의 직책을 수행할 때 세 번이나 쫓겨나면서도 직도(直道)를 견지하였던 고사로 유명하며, ‘화성(和聖)’으로 일컬어진다.
* 공구 - 孔丘. 공자의 본명.

맹자는 네 나이에는 배우기 어려운 학문이다. 그러나 네가 영민하고 욀총이 좋아 잘 따라오니 나는 기쁘기 한량없구나. 이 두 문장은 네가 평생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여인은 과거를 볼 수 없지만 장차 네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면 공부를 시켜 부디 고려의 재목으로 키우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 전에 먼저 네가 세상을 떠받치는 하늘 기둥이 되었으면 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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