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아오른 지하
황주현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202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시를 다시 읽는다. 요즘 시들은 길어지는 경향이 많은데 아마도 다양한 세상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부유한 나라가 되다 보니 지하철이며 건물이며 지하화되는 현상이 많아졌다.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건물이 무너지고 갇혀서 솟아오르는 상상도 해본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은밀한 지하의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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