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입산(入山)을 결심하다

“설화야, 맵짠 바람이 아직도 사방에서 불어오는 판에 어디를 간다고 하는 게야? 그리고 네가 거란 오랑캐를 상대로 어떻게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시면 경을 치실 거다. 잠자코 있거라.”

홍 씨 부인은 지아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받은 충격이 가실 즈음에 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화가 비록 나이 어린 소녀였어도 외모는 처녀티가 날 정도로 성숙했다. 딸이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홍 씨 부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주셔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네가 산으로 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잘못하면 이 어미까지 혼날 것이다. 하지만 네 소원이 정히 그렇다면 어미도 생각을 해보마. 일단 잠자코 있어봐라. 때를 봐서 말씀드려 볼 테니…….”

“어머니가 말씀드리기 어려우면 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말씀드릴게요. 날씨가 풀리면 저는 굴암산에 있는 산채(山砦)로 떠나고 싶습니다. 그곳에는 무술에 도통한 도인들이 여러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는 저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셔요.”

“알았다. 기다려 보거라.”

홍 씨 부인은 속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조부모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자 기다리다 못한 설화가 조부모에게 직접 본인 뜻을 알리기로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날이 풀리면 저는 먼젓번 전쟁 때 잠시 피난 갔던 굴암산 산채에 들어가 무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무술 고수가 되어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거란군의 아과수라는 자를 찾아가 복수할 겁니다. 제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셔요.”

“설화야, 방금 뭐라고 했느냐?”

설화 할아버지 이 씨가 놀라서 눈을 슴벅거리며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사내로 태어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를 보는 시선이 늘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어요. 당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가 할아버지의 안타까움을 덜어드리고자 합니다.

굴암산에는 여러 산채가 있고 그 산채에는 무술에 도통한 도인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굴암산으로 가서 무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저의 입산을 허락해주셔요. 어느 정도 무술을 배우고 나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아야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이 씨 노인 내외는 손녀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 씨는 설화를 볼 때마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자신의 태도에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씨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화야, 안 된다. 너는 이 씨 집안의 무남독녀다. 네가 가출하면 이 집안은 대가 끊긴다. 절대 안 된다. 할아버지는 너를 통해 *외손봉사를 생각하고 계시단다. 너는 공부를 많이 해서 가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것 아니냐? 할미가 이렇게 부탁하마. 제발, 가출한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설화의 할머니는 손녀에게 통사정했으나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설화에게는 할머니의 애원도 소용없었다. 설화 할아버지는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양손(養孫)이라도 얻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자신의 향화(香火)를 외손이나 양손에게 의탁하는 것을 퍽 마음에 내켜하지 않았다.
* 외손봉사 - 外孫奉祀. 직계 비속이 없을 때, 외손이 대신 제사를 받듦.

“할머니, 죄송해요.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손녀를 깊이 이해해 주셔요. 우리 집안에서 누군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잖아요. 저는 그동안 수백, 수천 번도 더 생각하고 고민도 했습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영영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 큰일이다. 손녀의 고집이 보통이 아닌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내가 안 된다고 하여도 가출할 아이다. 나의 지난 언행이 손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구나. 내가 넋두리처럼 하던 말을 손녀가 귓등으로 듣지 않았어. 저 애가 그동안 나의 말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이 씨는 손녀를 자닝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씨 부부는 설화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화는 완고한 조부모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는 한 번으로 조부모의 승낙을 받아 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름이 흘렀다. 설화가 다시 조부모를 찾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굴암산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요. 점차 날이 풀리고 있습니다. 저는 한시가 급합니다. 빨리 무술을 익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드려야 합니다. 저의 가슴을 지지르는 복수에 대한 의무감이 갈수록 무거워져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연로하시고 저에게는 오라비나 남동생이 없으니 제가 나서는 겁니다. 제가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되어 눅잦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제발, 이 손녀의 소원을 들어주셔요.”

이 씨는 손녀의 말에 속이 쓰렸다. 그도 아들이 전장에서 어떻게 전사했는지 잘 알고는 있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어 묵묵히 앉아 하릴없이 세월만 묵새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역시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거란까지 건너가 아과수를 죽일 방안이 없었다. 자신은 연로하고 손자도 없는 형편이라, 그는 아들의 복수를 포기하고 있었다. 손자가 있더라도 거란까지 보내 아들의 원수를 갚게 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설화야, 네가 사내라면 이 할애비가 승낙을 하겠다만, 계집아이가 산에 가서 무술을 배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네가 무술을 배운다 한들 어디 가서 아비의 원수를 갚을 것이냐? 엉뚱한 일에 조바심치지 말고 집에서 얌전하게 있다가 혼기가 차면 마땅한 총각과 혼인하도록 해라.”

설화 할아버지도 손녀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손녀의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그는 손녀의 가출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전쟁터에서 거란군에게 피살되자, 세상 살 의욕을 잃고 자주 술을 마시며 한탄했다.

이 씨 역시 고려군에서 한세월 살아온 무욕한 싸울아비 출신이었다. 거란이 첫 번째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에도 그는 아들 이관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었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나이가 들어 퇴역했지만, 여전히 그는 고려의 전사(戰士)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직한 성품과 불의에 항거하는 이 씨의 기질을 아들 이관이 물려받았고 손녀 설화한테 이어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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