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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도인과의 만남“맹호 형, 제가 이 산채에 대해 모르니 형님이 그때그때 알려주세요.”“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차차 똥겨줄 테니…….”오래전부터 굴암산에는 산채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수십여 동(棟)의 산채가 산재해 있었다. 그중 동림산채와 북림산채, 남림산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동림산채는 백수 도인이 주인이고, 북림산채는 허일 도인이 이끌며, 남림산채는 태사라는 도인이 주축이었다.산채의 주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산채를 세운 게 아니었다. 북방 세력과의 잦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고려 백성들을 보호하고 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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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4.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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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들그는 사내로 행동해야 할 곳에서 이름 끝 자에 ‘화’를 쓰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도인들이 받아준다면 설죽화는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산중에서 사내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가 소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꽃 화(花)를 떼어내야 했다. 가뜩이나 얼굴이 곱상한데 계집애들이 쓸법한 이름을 쓴다면 산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설죽이라, 설죽! 눈 설(雪)에 대나무 죽(竹)이렷다. 눈밭에 자라난 고고한 절개의 대나무라? 사내 이름치고는 너무 고상하구나. 이름에 무슨 사연이 있는가 보구나. 기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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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4.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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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화에서 다시 설죽으로내실 바닥은 삿자리가 깔려 있는데 만져보니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벽의 말코지에 옷가지와 모자처럼 생긴 것들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활과 동물 가죽으로 만든 전통(箭筒) 서너 개가 매달려 있었다. 내실 귀퉁이에는 커다란 목함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위에 잘 개어진 검정색 요와 이부자리가 접침접침 개켜져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다.설죽화는 부엌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어둑시근한 부엌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하얀빛이 새어 들어와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설죽화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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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4.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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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산채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산에 산채가 하나둘 생겨나더니 전국에서 무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을 때는 사오백 명 정도까지 있었지만 거란과의 두 차례 전쟁으로 인하여 현재는 예전의 절반도 안 되는 수련생들이 기거하며 무술을 익히고 있었다. 수련생들은 산쟁이처럼 수렵과 농사로 자급자족하면서 산채에 거주하는데 한번 입산하면 보통은 삼사 년 동안 하산하지 않고 무술 연마에 전념하였다.수련하는 사내들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속세를 떠나 진실로 몸과 마음의 수양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장차 고려 중앙군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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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4.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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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일기송상목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버스에 올랐다 내리고빌딩을 오르고 나면정오가 된다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수저를 든다 기쁨이키스해온다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키스는 짧고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나는 기쁨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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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4.04.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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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암산을 향해 떠나다“이 할애비는 우리 손녀를 믿는다. 이왕 마음먹었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 무술 연마도 좋지만 항상 주위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산에는 호랑이나 곰, 늑대 같은 맹수들이 살고 있다. 늘 주변을 살피며 다니거라.”이 씨는 집 떠나는 손녀가 측은하여 손을 잡고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그는 할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헛기침만 깇었다.“이 할미는 천지신명님에게 우리 손녀 잘되게 해달라고 빌 것이야. 부디 몸조심하고 오로지 무술 연마하는 데에만 전념하거라. 또한, 너는 사내가 아니라는 점을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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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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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서 설죽화로 개명하다“할아버지, 아버지 원수를 갚고 나서 혼인해도 늦지 않아요.”“설화야, 너는 사내가 아니야. 그냥저냥 집에서 공부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거라. 세월은 금방 흐른단다. 네 애비는 운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데 네가 어떻게 무술을 배워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는 거야?”설화의 할머니도 손녀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가하겠다는 손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할머니, 제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드리지도 못하면 그 죄스러움을 평생 가슴에 응어리로 묻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무술의 고수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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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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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入山)을 결심하다“설화야, 맵짠 바람이 아직도 사방에서 불어오는 판에 어디를 간다고 하는 게야? 그리고 네가 거란 오랑캐를 상대로 어떻게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시면 경을 치실 거다. 잠자코 있거라.”홍 씨 부인은 지아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받은 충격이 가실 즈음에 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화가 비록 나이 어린 소녀였어도 외모는 처녀티가 날 정도로 성숙했다. 딸이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홍 씨 부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어머니,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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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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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가문의 무남독녀“모든 것이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소녀가 아직도 많이 민충합니다. 부단하게 노력하여 반드시 스승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네가 너무 겸손하구나. 네 나이에 이 만큼의 학식을 쌓는다는 것도 어렵단다. 네가 소양배양하지 않고 사물을 보는 눈이 재바르며, 일단 깨달은 것을 가축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너에 대한 훈육을 부탁하셨다. 지금까지 배운 병서 내용 중에서 하나만 물어보겠다. 아는 데까지 답하여 보아라.”이관은 여천 선생에게 설화를 맡기면서 경서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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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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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지하황주현몇 겹 속에 갇히면그곳이 지하가 된다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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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4.03.0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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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설죽화 스승의 여제자에 대한 기대황음무도한 야율문수노는 그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올해로 마흔여섯인 그는 풍신이 장대하고 상당한 호색한으로 소보살가(蕭菩薩哥) 등 부인 세 명을 두었다. 그 외에 첩으로는 귀비 소씨(蕭氏) 등 열여섯 명을 두었고 자식은 야율종진 외에 스무 명이 넘었다.고려 성종(成宗) 십 년, 거란의 부마이자 동경유수인 *소항덕은 팔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동원한 군사는 육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거란 왕 야율문수노의 누이인 야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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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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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인 거란왕, 야율융서웅숭깊고 오달져 보이는 홍 씨 부인의 뺨 위로 매작지근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관의 부모는 병사들로부터 아들의 무용담을 듣고 겉으로는 무척 대견해 했다. 애전 전투에서 전사한 대부분의 고려군은 북계의 *강동 육주 출신이었다.전쟁 끝물에 강동 육주에 있는 마을들 대부분이 초상(初喪) 촌이 되다시피 했다. 관아에서는 전사한 사람들의 가족에게 약간의 부조를 하고 현령이 마을을 돌며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 마을마다 공동묘지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있어야 했다.‘이관이 애전 전투에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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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2.24 06:00